칼럼
이번에는 ‘간판’ 얘기다. 상점 주인에게 간판은 손님을 만날 수 있는 접점이다. 간판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일 것이다. 오래 전 얘기지만 새로운 간판이 동네에 하나 생기면 ‘떡’을 돌리고, 사람들이 모여 돼지 머릴 두고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간판 진수식이라 할 만큼 밤늦게까지 시끄러웠다. 하지만 요즘 간판은 애물단지가 된 듯하다. 지방 자치 단체들은 도시 정비를 이유로 간판 정비 일제 기간을 두기도 한다. 이를테면 상점 주인과 숨바꼭질을 정기적으로 하는 셈이다. 아예, 간판 디자인 공모전을 자치 단체가 주도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 간판은 도시미관의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취급받는다.
‘간판과 기획’ 얘기를 쓰려고 하다 보니 간판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간판의 모든 것’을 페이스북에서 검색해 보니 재치 있고 기지 넘치는 간판이 넘쳐 난다. ‘간판 기술’ 시대에서 ‘아이디어 간판’ 시대를 맞이한 것 같다.
해외 유명 도시 간판과 우리나라 도시 간판에는 차이점이 하나 있다. 해외 간판은 ‘이미지’ 중심였고, 우리 간판은 ‘글자’ 중심인 점, 해외 간판은 '4절지' 크기 정도인 반면 우리는 '대형 간판'도 부족한지 '입간판' '애드벌룬 간판' '돌출형 간판' 등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점이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주 들르는 상가 건물 외벽을 살폈다. 상가 외벽은 한 뼘 공간도 없이 간판으로 빼곡하다. 일심동체 형 프랜차이즈 간판에서부터 한 글자 ‘酒’, 문장형 간판 ‘우리 ‘헤어hair’지지 말자’까지. 간판 글만 봐서는 감성시대까지 온 듯하다. 하지만 한 치 게으름도 용납지 않겠다는 듯 ‘영어’ ‘수학’ ‘국어’ 두 글자가 두 쪽 창에 똑 소리 나게 붙어 있는 것도 있다.
상가 입구에 서 있는 입간판은 도시 정비 대상이다. 민원이 끊이지 않는 골치 거리다. 지나가다 부딪히는 것은 예사다. 애드벌룬 형 입간판은 요즘 대세지만 전기 힘으로 서 있는 탓에 전깃줄에 발이 걸리기도 한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에는 입간판이 날아다녀 사고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옥외 광고물 설치에 관한 법률을 지키고는 있지만 ‘먹고사니즘’ 탓에 감시망을 잠시 피하면 거리로 다시 나올 수밖에 없다.
주상 복합 건물 앞에는 입주 상점들 안내판이 따로 있었다. 안내판에는 상점 이름을 A4 용지 크기로 입주 순서대로 붙여놨다. 분식·피자·치킨·빵집·헤어숍·부동산·학원·병원·약국·옷가게 순서로 입점한 듯하다.
이런 방법은 어떨까. 먼저 업종이 같은 상점끼리 묶는다. 식당끼리 학원·병원끼리 말이다. 옷가게·부동산·약국도 이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된다. 이 때 한 묶음에 포함하는 기준이 있다. 각 묶음 속 정보는 개수가 같아야 한다. 우리 뇌가 정보를 3개씩 묶어 하나로 기억하는 '청크(chunk)''의 원리다. 청크가 많아지면 이마저도 헷갈린다. 그래서 각 묶음에는 이름표를 붙여 기억한다. 백반·설렁탕·부대찌게는 '밥'을 공통점으로 하는 '한식'으로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분식점이 문제다. 분식점에는 세상의 모든 음식이 다 있다. 실제로 분식점 한 곳 메뉴를 세어보니 68가지나 된다. 분식점은 양식과 겹치고 중식과도 중복되는 음식이 많다. 새롭게 음식이 개발 될수록 한식·일식·중식 분류에서 누락되는 것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처럼 수집한 정보를 분류할 때 '중복되거나 누락된 것'이 많으면 우리 뇌는 복잡하다고 느낀다. 복잡하면 선택을 망설인다. 망설임 속에 선택한 음식 맛이 '억지춘향'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해외 유명 도시 간판이 예쁘게 보이는 까닭은 복잡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판이 도시 미관의 화룡점정(畵龍點睛) 되기 위해서는 '단순 명료'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복잡한 정보를 '단순 명료'하게 정리하는 원리를 MECE(엠이씨이·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정보가 많아지자 뇌가 꾀를 내 청크를 만들고, 청크도 많아지자 'MECE'라는 꾀를 내서 청크로 묶인 정보에 공통점이 없거나 중복되거나 누락된 것이 있으면 토해 내는 것이다. 꾀가 제대로 통하면 '로직트리(Logic Tree)'에 정보들이 착착 들어 앉는다. 단순 명료해서 한눈에 감기고 예쁘다. 우리 주변 간판이 복잡한 것은 '꾀'를 내지 않는 부지런함 때문은 아닐까. 이제 도시미관을 위한 '꾀'를 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