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길들이기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먼저 온 미래였다>에 이어서 <먼저 온 미래>의 2장 <오만과 편견, 그리고 창의성>을 읽고 쓰는 글입니다.
바둑인들은 바둑과 체스는 다르다고 믿었습니다.
바둑을 잘 두려면 추상적인 관념을 이해해야 했고, 바둑인들에게는 그래서 바둑이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그런 이유로 장의 제목에 '오만과 편견'[1]이라는 문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중앙일보 기사를 인용하며 당시 바둑계의 보편적인 시간을 전합니다.
어떤 수는 왜 최선인지 설명할 수는 없어 감(感)이나 기세라는 단어를 동원한다. 이 감이나 기세를 컴퓨터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다시 기사를 보니 2006년의 인식이네요. 조훈현 9단의 편견[2]이 박제되어 있습니다.
과학은 무한하니까 수백 년이 지난다면 컴퓨터가 이길 수도 있다. 더구나 인간은 실수가 있지만 컴퓨터는 실수가 없지 않은가
인터넷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겠네요. 과거보다 사실을 받아들이기 쉬운 시대가 된 듯합니다. 사실이 데이터와 정보로 존재하기 때문이죠. 아무튼 조 9단의 예상과 달리 10 년 만에 컴퓨터가 이긴 것이죠.
감(感)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수학의 숲을 걷다>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릅니다.
어떤 문제를 풀 때도 좋은 증명은 주로 좋은 추측으로부터 나옵니다. 대가일수록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감'이 좋아야 합니다. 수학에서는 문제를 푸는 것보다 좋은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할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바둑계와 수학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바둑계는 이미 침공(?) 당한 지 10년이 지났다고 할 수 있고, 수학은 다가 올 미래에 대한 의견에 가까운 듯합니다. 다시 한번 책 제목 <먼저 온 미래>가 직관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는 수학에만 국한된 미래는 아니겠죠.
배운 대로만 하는 것은 프로그램program이라는 말의 의미와 맞닿아 있습니다.
'기계는 배운 대로만 둔다, 창의성이 없다'라고 생각했다.
퍼플렉시티에게 프로그램의 어원을 물었습니다.
"program"의 어원은 "무엇인가를 정해진 순서대로 차례차례 진행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시작되어, 컴퓨터 명령어 집합을 만드는 행위에 비유되어 현재의 프로그래밍 용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프로그래밍 개발 산업의 근본적인 생산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지난 4월 <소프트웨어 3.0 혹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퍼플렉시티의 견해를 참조합니다.
새로운 버전을 제시하는 이유는 소프트웨어가 단순히 ‘정해진 순서의 명령어 집합’을 넘어서 데이터와 학습, 그리고 생성 및 자기 개선 능력을 포함하는 복잡한 생태계로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로그램의 ‘순서와 규칙’에서 출발한 개념이 점점 더 고도화된 인공지능 시스템으로 진화하는 흐름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버전은 프로그래밍과 소프트웨어 작동 원리의 큰 변곡점을 나타냅니다.
다시 한번 '먼저 온 미래'를 실감하는 문장을 만납니다.
이세돌 9단은 알파고와 다섯 번의 대국을 마친 뒤 "인간의 창의력, 바둑 격언, 기존의 수법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이 정말 맞는가”라고 말했다.”
당시 워낙 센세이션을 일으켰기 때문에 저 역시 글을 썼던 흔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지금 공감하는 수준과는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난 2년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세돌 9단의 말을 이해하기는커녕 당시와 같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듯합니다. 지금 관심이 가는 이유는 저 역시 '인공지능 FOMO'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봅니다.
이게 말이 돼? 이 수가 맞아? 진짜 바둑을 새로 배워야 하나?' 우리는 그때 알파고의 수들을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그 수들을 인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죠. 그 당시에는 굉장히 회의적이고 비관적이었어요.
이번에는 <인공지능 길들이기>의 결과로 <인공지능의 들쭉날쭉함을 포용하기> 관점에서 바둑계의 혼란 속에서 등장한 질문들에 답해 봅니다. 하지만, 그대로 투사하기에는 아직(?)은 좀 어색합니다. 바둑과 달리 코딩은 승부와는 조금 빗겨 나 있습니다. 바이브 코딩을 하면서 인공지능과 겨루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적어도 아직은 그렇습니다.
다음은 바둑 교육 앱을 개발해서 보급하는 김찬우 7단의 견해입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대상을 분류해요. 그렇게 범주화하면서 약간 오류가 있어도 무시하고 데이터를 카테고리로 관리하죠. 그렇게 관리를 하니까 고정관념이 생겨요. 그런 고정관념들이 일을 빨리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어떤 요소들은 배제하게 돼요. 어쩔 수 없죠. 머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유한하니까. 그런데 인공지능은 그렇지 않죠. 모든 요소를 다 고려합니다.
통찰력 있는 설명입니다. 한편, 도리어 인간의 지적 업무를 대신하게 하려고 인공지능 속에 일종의 고정관념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컨텍스트 엔지니어링 같은 기술의 영향으로 생긴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을 읽을 때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생각이 흘러갔습니다.
사실 문학이 뭐냐는 질문 자체에 대해서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뿐 아니라 다른 소설가들도 마찬가지다. 인터뷰나 강연장에서 바로 그 질문을 받는데, 답은 제각각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많은 소설가와 평론가가 문학이 뭔지 제대로 정의도 내리지 못하면서 '누구누구의 작품이 대단히 문학적'이라고 말한다. 차라리 '끝없이 먼 길을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거나 '아직도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편이 더 정직한 것 같은데.
아마 문학 작가와 거리가 먼 제 입장에서는 완전한 공감이나 몰입이 힘들었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무근성연구소에서 주최한 배동훈 대표님의 강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창작자(Creator)가 아니라 프로듀서(Producer) 역할로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들의 역할이 바뀐다는 개념화가 굉장히 인상 깊었던 탓입니다.
이어서 의미심장한 저자의 메시지가 던져집니다.
오히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써왔던 게 뭔지 파악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문학성과 독창성의 의미를 곱씹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멍하니 거리를 한참 걷고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 울지도 모르겠다. 터미네이터가 등장하지 않아도, 내가 해고되지 않아도 나의 깊은 부분이 인공지능의 발전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1]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으로 한자 사전을 찾습니다.
두 글자의 뜻이 같은데, 거만할 오(傲)와 거만할 만(慢) 자를 확인해 봤습니다.
[2] <낱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는 일의 소중함> 실천으로 한자 사전을 찾습니다.
1.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먼저 온 미래였다
(14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4. 데이터 인터페이스로서 LLM이 갖는 중요한 역할
16. AI는 저장된 기억을 검색하지 않고 패턴에 의존한다
17.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핵심은 정보의 조합과 응용 과정
20. 인공지능은 언어적 일관성에 의존하는 새로운 지능이다
22.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먼저 온 미래였다
23. 포토샵 대신 나노바나나로 갈아타는 첫 발을 떼다
25. 다음에 나오는 단어를 예측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