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눈답게 죽을 수 있는 곳

by 킴 소여

도시에서 눈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내리는 동안만 순백의 고결함을 유지하였다가 땅에 닿는 순간 검은 피를 흘리며 짓밟힌다. 허나 자연에서의 눈은 내리는 순간부터 땅에 내려앉은 후에도 우아한 순백의 미를 그대로 간직하다 시간이 지나 고결히 햇빛에 사라진다.




아침부터 눈싸라기가 약하게 날리더니 참관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엔 보드라운 눈발들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다. 눈을 보기 힘든 대구에서 자란 탓인지 저 나약한 눈송이 송이들이 쌓여가 주는 것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 해질 무렵 햇빛의 기력이 쇄해지자 쌓이기 시작한 눈은 해가 지기 무섭게 눈발이 더욱 기세등등해진다. 빠른 속도로 땅을 메우더니, 이윽고 밤이 왔을 땐 완전히 온 세상을 재패한다.

눈 쌓인 마당은 달빛을 받아 푸르뎅뎅한 형광빛을 띤다. 이렇게 눈이 많이 쌓인 것을 난생처음 본 아이들은 당장 잠옷 바람으로 용기 있게 현관문을 박차고 나간다. 하지만 이내 맞닥뜨린 춥고 드센 깜깜한 겨울밤의 기세에 눌려 한 발짝 이상 더 떼지 못하고 시무룩히 방으로 돌아온다. 미련이 남은 아이들은 거실 통창 앞에 바싹 붙어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담요를 둘둘 감아주곤 거실 통창을 조금 열어준다.

"추우면 집에서 만지면 되지~"

하며 내가 먼저 손만 쑤욱 내밀어 거실 앞 마루 위로 쌓인 눈두턱을 스윽 쥐어 보인다.

'뽀드득'

아이들도 따라 작은 손을 빼꼼히 내밀어 한 움큼씩 쥐어본다.

'뽀드득. 뽀드득.'

금세 차가움에 몸을 찌르르 떨면서 눈을 찡그리는데 입은 함박미소를 짓는다.


눈을 만진 것에 만족하며 창문을 닫는다. 잠시 열었을 뿐인데도 방으로 쏟아져 들어온 겨울을 재빨리 떨쳐내려 아이들은 앞다투어 침대 속 이불로 뛰어든다. 그러면서 눈만 빼꼼히 내밀어 창밖 정원을 본다. 달빛에 희미하게 보일랑말랑 연약한 눈송이들이 설원에 보태어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스르륵 눈이 감긴다.





다음날 아침. 평소와는 묘하게 다르게 푸른빛의 아침햇살을 은연중에 느끼며 자연스럽게 눈을 뜬다. 전날 눈이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몸을 일으키다가 절로 감탄사가 터진다.

"어머나!!"

침대 옆 통창 밖으로 설경의 마당 정원이 아침햇살을 산란시키며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전날 밤엔 어둠에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낯선 아름다움이었다. 눈이 온 세상을 밀가루 반죽처럼 하나의 둥근 곡선 덩어리로 뭉쳐두었다.


제주의 설경이 처음인 초짜 이주자는 한참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다 다급히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든다. 그리곤 이 아름다움을 담지 못하는 답답함에 셔터만 무한정 눌러댄다. 엄마의 분주한 움직임에 잠에서 깬 아이들은 덩달아 흥분해 잠바를 우겨 입곤 밖으로 튀어나간다. 눈에 보이는 즐거움은 추위로도 막을 수 없어 아이들은 눈놀이 삼매경에 빠져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칭얼거린다.

오늘도 제주시에 참관교육 일정이 있어 바쁜 나는 매정히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밀어 넣고 온다. 돌아와서 남편과 둘이 한번 더 조용히 설경을 감상한다. 따뜻한 커피를 내려 마시며 마음껏 넋을 놓고 있는데.. 시계를 보곤 정신이 번쩍 든다! 지각이다! 결국 나는 밥 한 술 못 뜨고, 내리고 남은 커피만 겨우 텀블러에 담아 정류장으로 달린다.


스노체인을 미쳐 준비못해 차를 몰고 한 시간가량의 산간도로를 넘어갈 자신이 없어 버스 타기를 택한다. 제주에 아무리 오래 있었어도 늘 차가 있으니 버스를 타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도보 5분 거리의 정류장으로 가는 길. 두둑히도 쌓인 눈들을 롱패딩에 등산화까지 신고 내의를 너무 껴입어 조금 뒤뚱 거리는 걸음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넘어간다. 정류장까지 따라 나와준 남편이 이 모습이 시골펭귄 같다 놀리며 뒤에서 자꾸 동영상을 찍어댄다. 매일이 예상할 수 없는 일상적이지 않은 일상들.


기다리던 버스가 오자 들뜬 마음에 올라탄 버스 안에서 신나 있는 건 나 혼자인 것 같았다. 다른 승객들은 매일 버스를 타고 오가는 듯 긴 승차가 지루해 죽겠는 표정들뿐이었다. 창 밖이 잘 보이는 좌석을 골라 앉아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 혁오의 '공드리'를 재생시킨다. 그리곤 쫄쫄 굶은 빈 속에 쌩 아메리카노를 부어 넣으며 바라보는 버스 밖 설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새로운 아름다움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감독 '미셸 오드리'의 이름을 오마주한 설원의 MV가 오버랩되면서, 영화보다 오히려 더 비현실적인 지금 이 순간이 영화처럼 느껴진다.




버스로 1시간 반. 환승 한 번에 정류장에 내려선 10분 정도 걸어 도착하는 경로이다. 아침 눈멍으로 준비가 늦어진 탓에 지각하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버스를 탔다. 환승에 성공 후 마지막 정거장까지 잘 내렸다. 허나 겪어본 적 없는 제주의 엄청난 눈보라는 초행길인 내 정신을 혼미하게 때렸다. 걸어서 10분 거리의 길을 무작정 택시를 잡아 탔고, 막상 내릴 때가 되서 기본요금을 내기도 민망한 코 앞 거리임을 알게 된다. 그래도 그 덕분에 수업시작까지 10분 정도 남았다. 공복에 너무 배가 고팠던 터라, 참관수업에 들어가기 전 근처 편의점에서 급하게 삼각김밥 하나를 욱여넣고 딱 제시간에 맞춰 참관 공부방으로 들어간다.


참관수업은 실제 운영 중인 다른 선배 원장의 공부방에 가서 직접 수업하는 모습을 참관하고, 나도 연습으로 아이들을 가르쳐 보는 실습 과정이다. 오늘로 둘째 날인 참관수업은 폭설로 첫날 왔던 아이들 중 몇몇은 결석을 하고, 눈길 운전에 지각도 많아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임에도 노련한 베테랑 선배 원장님은 정돈된 모습으로 착착 수업을 진행하신다. 열심히 보고 배울 점들을 필기하며, 다음 3일 차부턴 내가 학생 몇 명을 가르치기로 했는데 벌써 긴장이 앞선다.


수업을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되돌아간다. 눈도 많이 그치고 아까 왔던 길이어서 이번엔 택시를 잡는 우를 범하지 않고 침착히 간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눈은 거의 그쳤지만 도로 위엔 낮에 쏟아진 폭설로 훨씬 더 높은 눈길이 쌓여있었다. 오늘따라 더 커 보이는 버스는 스노체인을 칭칭 감고 듬직히 산길을 뚫어 바퀴를 굴려 나간다.




집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간다. 매일 돌아가는 집으로 가는 길. 거기에 더해진 설경은 매일 가는 길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아름다운 순간을 견디다 못해 핸드폰 동영상이라도 켜본다.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 소리도 담으며 이제 몇 발작 남지 않은 집 마당으로 들어서려는데!

'포다닥!!'

갑자기 웬 산 짐승이 지나간다. '뭐지??' 하며 그쪽을 보는데 그 짐승도 날 본다.

"응?? 옴뫄~???"

"으잉?? 찬이야??!?"

다름 아닌 둘째 찬이였다. 서로 놀라며 멈춰있기를 잠시, 찬이가 꺄르르 웃으며 달아난다.

"아뽜~~~ 엄마 왓쪄~~~~~프헤헤헤헿"

도망치는 아이를 괜히 나도 쫓아가며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폭설에 마당의 지면이 아침보다 더 굴곡 없이 높고 평평히 상향평준화되어 있었다. 낯선 정원의 모습과 정원 벤치에 앉아있는 괴상하게 생긴 눈사람에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진다. 마침 아빠와 숨바꼭질 중이던 아이들은 야생동물마냥 풀숲 사이사이를 웅크리고 숨어있다. 율이는 들킨 모습을 숨기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다 철푸덕 자빠지고, 찬이는 괴상해도 힘들게 만들었을 눈사람을 무참히 벤치 위에서 밀어 넘어뜨리곤 천사처럼 웃는다.




눈을 마음껏 기뻐할 수 있는 자연.


눈이 품위를 유지하며

끝까지 눈답게 사라질 수 있는 자연.


아이가 아이인동안

끝까지 아이다울 수 있는 자연.


내가 나인동안

끝까지 나일 수 있는 자연.

모든 만물이 그 자체일 수 있는

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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