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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 소여 Jun 15. 2024

유통기한 3년 지난 비빔면을 먹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를 애매하게 오가던 계절은 오늘 아침의 '확실한' 비로 가을의 경계를 넘어섰다.

계절의 애매한 양다리를 혼내듯 빗소리가 유난히 따갑다.

두툼한 구름으로 차분해진 아침 햇살은 빗줄기를 한 줄기 한 줄기 정성스레 감싸

빗줄기가 하나 하나 눈에 도드라져 들어온다.

도시 속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던 때에는 느낄 수 없던 생동감.

면이었던 세상이 선으로 보이는 느낌.

자연과 더 가까워진듯 하다.


그렇게 창가에 앉아 비멍을 즐기며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우습게도

 '이제 추워서 서핑하긴 글렀군.'이다.

서핑이라곤 이제 달랑 2번 해봐 놓곤..ㅎ

멍하니 세상을 골고루 적셔주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제 추석날 내내 좋지 않았던 기분이 함께 씻겨진다. ([15화. 명절병] 편 참조)


기분이 좋아지니 식욕이 생긴다.

찬장을 살피는데 대구에서 챙겨 온 짐 중에 딸려 들어온 비빔면이 보여

비빔면에 골뱅이를 넣어 청양고추까지 송송 썰어 곁들인다.

맛의 궁합을 위해 비록 아침이지만 모닝 막걸리도 한잔 걸친다.

시원한 초가을 비를 보며 매콤 새콤한 비빔면을 입안 가득히 베어 물고,

입안이 얼얼해질 때쯤 시원하면서 달콤부드러운 막걸리로 가라앉힌다.


자연경치를 벗 삼아 맵단맵단의 조화를 오가며 취기까지 살짝 돌자 만사가 형통하다.

그 덕에 다 먹고 봉지를 정리하다

방금 먹은 비빔면이 유통기한이 3년이 지났다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음에도

그냥 허허 웃어넘겨진다.ㅎㅎㅎㅎㅎㅎ;;;;;

(그러고 보 밀가루 맛이 평소보다 쫌더 강했던 것 같기도..... .  .   .?¿)

유통기한 3년 지난 비빔면 with 모닝 막걸리

아무리 제주살이를 온들 3개월 내내 어떻게 매일매일이 즐겁고 다이나믹하기만 하겠는가.

어제처럼 괜스레 처지는 날도 있고, 오늘처럼 집에서 그냥 먹고 자고 노는 날도 있어야지.

새 찬 비에 발이 묶인 우리는 자동 집콕행 열차 티켓을 최대한 즐기기로 한다.


집 앞 풀 속에 비로 인해 지렁이나 달팽이 따위를 만나기 기대하며 리조트 산책로를 어슬렁거리자

생각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방역을 잘한 탓일까;

때마침 리조트 관리원 할아버지가 아이들이 꼼실거리며 땅바닥을 뚫어져라 보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귀여워해주시며

"비가 내리고 있을 땐 지렁이도 안 나와~

그치고 나오지~" 라며

대신 마음 속의 질문에 답해주신다.

역시나 소득 없이 도토리만 잔뜩 주워가지곤 돌아온다.

우비에 장화 신고 구지 빗 속을 뚫어 모은 도톨들;

어느덧 오전의 새찬 비는 잦아들고 씻겨진 하늘에 붉은 노을이 더 말갛게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에 이어 같은 창밖을 바라봄에도, 시간에 따라 또 다른 풍경이 너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온 세상에 노을을 빠짐없이 한 시럽씩 묻힌 모습이라니.

평온해진 내 자아는 이런 작은 아름다움들을 받아들일 감수성이 준비되었고

괜스레 배우지도 못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충동에 예전에 사두었던 색연필을 꺼내 일기장에 담아본다.

이 모습을 보고 아이가 자기도 따라 그리겠다고 스케치북을 주섬주섬 챙겨 와 옆에 찰싹 따라붙은 체온이

이 순간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_ 노을이 묻어있는 오후 5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남편은 기운이 나

해질녘 2층 야외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아이들에게 몸을 담그게 해 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빈 벽에 빔프로젝트를 틀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틀어준다.


우리도 저녁거리를 포장해 와 자연 일몰뷰를 배경으로 영화와 함께 저녁을 즐긴다.


일몰 + 스파 + 빔 영화 = ???   (정답: 극락)




오늘은 9월의 마지막날.

제주 온 지도 보름이 되었구나.

어제 추석 당일날 정월 보름달을 보며 율이가 빈 3가지 소원이 떠오른다.


  "달님, 매일매일 우리 집 앞에 와주세요."

  "코코(애착인형)가 숨을 쉬고, 살아 움직이게 해 주세요."

  "엄마, 아빠가 제가 먹고 싶어 하는 것만 먹게 해 주세요."



나는 무슨 소원을 빌어야 했을까.


'모든 걸 버리고 제주로 온 우리 가족을 어여삐 봐주소서?'


아님..


'제주살이 3개월의 여정 뒤에

우리 네 식구가 갈 길이 어디 일진 모르겠으나..

어디이든 꽃길이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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