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하고, 9-6 직장이 사라지면서 가장 못 견디게 된 것은 일상의 권태다. 직장을 다닐 때는 매일 왜 인간은 9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고찰을 매일 했는데, 없어보니 알겠다. 사람은 지나친 자유가 주어지면 못 쓴다. 나처럼.
집 앞 도서관을 가야지 했던 것은 쏟아지는 임신 초기 졸음에 못 이겨 딱 세 번 이루어냈고, 매일 아침 일찍 저녁 일찍 강아지 산책을 해야지 했던 건 아침 느지막이, 저녁 먹고 산책을 해야지로 바뀌었다. (다행히 하루 두 번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책을 읽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강아지에게 공을 던져주는 것도, 요리를 해 나를 먹이는 것도, 바디로션을 발라 건조해지는 살이 느끼는 부담을 줄여주는 것도, 그 모든 것이 권태롭다.
운동을 하려야 뛰지도 말라하고. 얼마 전 아는 선배 결혼식에서 맡은 와인 향이 아직도 코끝을 맴돈다. (임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친한 누군가는 와인 한 모금도 안 마시는 나를 보고 딩크가 모성애 가득한 모친으로 급선회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가 다른 선배에게 된통 소리를 들었다.) 겨울이면 끓여 먹던 영지버섯은 임신 중에 먹으면 안 된다고 하여, 올봄에 사둔 것이 그대로 찬장행이 됐고, 다른 걸 마셔볼까 하고 뒤졌더니 나온 것은 녹차나 홍차나 느릅나무(달인 물은 동의보감에서 낙태약이라고 한다) 따위였다.
고기는 입에 안 들어가고, 목구멍 안쪽에서는 먹지도 않은 단 맛이 돈다. 속은 더부룩하고, 며칠 전엔 하루 종일 이유 모를 설사를 했다. 가습기를 켜면 바닥에 물이 맺히는데, 가습기를 끄면 피부가 온통 건조해서 하루 종일 보습제를 발라야 할 지경이다.
얼마 전 실험적으로 사본 귤은 너무 커서 껍질이 단단해 맛이 없고, 새로 사려하니 안 먹는 과일도 집에 한가득이다. 반찬이 가득 차서 냉장고도 꽉 차 있지만 입맛이 안 돈다. 일 인분 요리를 하기에 나는 너무 귀찮고, 안 하자니 배가 고프다. 하루에 세 번이나 이 일을 반복한다. 그러면서도 늦은 시간에 허기가 진다. 그래, 이틀째 너무 늦은 시간에 허기가 져서 쫄면을 일 인분 비벼 남편과 나눠 먹었다.(남편은 무슨 죄람)
이쯤 되니 우울증이 온 것인가 싶다. 일전에 알던 선배는 어느 날 집에 늦게 들어갔더니 일을 쉬고 아이를 보는 아내가 울면서 하소연했다고 했다. 집에 말 안 통하는 강아지랑 아기 있는데 당신마저 늦게 오니 미쳐버릴 것 같다고.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원래 살던 곳에 있어도 어차피 만날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집도 아주 넓어지고 신식이 된 데다가, 집에서 차를 마시나 나가 마시나 그게 그거인 기분이다. 나간다고 뭘 할 게 있는 것도 아닌 이곳에서는 더 할 것이 없다. 권태다. 우울이다.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