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헬로해피 Apr 25. 2024

나는 지금 휴면 상태입니다

#1. 예지몽.


꿈 1)  한 아이가 계속 주변 물건들을 쓸어 바닥으로 쏟아 버린다. 나는 그 아이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두 손을 붙들고 난감해 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는 옆 사람에게 이 아이의 두 손을 이렇게 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설명을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내 대신 이 아이를 돌봐야할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아이를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변명 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유독 뜨거웠던 올 여름이었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뜨거운 햇빛을 피해 집콕 생활을 고수했다. 휴일 마다 산으로 가는 남편을 따라나서지도 않았다. 계절이 가을로 돌아서자 나는 더위로 지쳤던 정신과 육체를 재무장하기 위해서 다시 걷기로 결심을 했다.

여름 내내 집에서 몸을 바닥에 뉘이고 있는 동안 생각도 주저 앉아버렸다. 아무 일 없는 휴식이란 며칠은 참으로 달콤하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곧 무기력함으로, 무기력함은 우울감으로 내려앉는다. 그리고 우울감은 몸의 통증으로 표출된다. 우울감과 통증이 두려워질 무렵 다행히도 다시 계절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계절에 몸을 실어 다시 힘을 내어 살아 보는 수밖에.

나는 오랜만에 팔다리를 움직여서 공원을 걷는다. 몸에서 우두둑 우두둑 뼈마디가 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선선해진 날씨만큼이나 그렇게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머리도 상쾌해져 멍했던 두통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나는 오늘, 두 달 전 까지만 해도 내가 돌보아 왔던 Y와 함께 걷던 공원을 다시 걷고 있는 것이다. 이 메타세콰이어 길을 걸을 때, 풍차 도서관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아이가 생각 났다. 친구들과 이 길을 걸을 때도 나도 모르게 ‘이 길을 그 아이와 참 많이도 걸었었지.’라며 저절로 Y를 떠올렸다. 나는 한동안 그럴 것이다. 이 장면이 내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 아이가 생각났고 저절로 어젯밤에 꾼 꿈이 생각났다. 오늘 아침 걷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묻히고 사라져버렸을 별 임펙트도 없는 흐릿한 꿈이었는데, 오늘의 이 꿈의 기억으로 두 달 전에 꾸었던 꿈도 굴비처럼 엮여서 내 머리 속을 빠져 나왔다.


꿈 2) 한 여자(아기 엄마)가 조수석에 갓난아기를 태우고 난간이 없는 다리를 위태롭게 건너 오고 있었다. 난간이 없으니 다리 가운데로 오면 좋을텐데 자꾸 오른쪽으로 치우쳐서 위태롭게 오고 있다. 나는 그 불안한 자동차가 강물에 빠질세라 조마조마하며 지켜보고 굳은 듯 서 있었다.

‘저러다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면 어쩌지?’

자동차 바퀴하나가 다리 끝에 위태롭게 달려 있다가 다행히도 후진으로 바퀴를 빼내어 위험한 순간을 모면했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잘 넘겼구나. 이제 괜찮겠지? 설마…….’ 불안감과 동시에 어김없이 그 자동차가 강물 위로 첨버덩! 하고 굴러 떨어졌다. 나는 당황하여 우리 언니를 불렀다. 그러자 어디선가에서 언니가 나타났다. 언니는 재빨리 강물 속으로 들어가 아기를 꺼내 와서 내게 건네주었다. 다행히도 강물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그리고 언니는 아이 엄마를 구해야 한다면서 다시 강물 안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는 통에 아이는 온전히 내게 맡겨졌다.

‘언니는 왜 이렇게 늦는 걸까.’

나는 강물이 별로 깊지 않아 별일이 없을거라 생각해서 언니와 아이 엄마가 무탈하게 바로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언니와 아기 엄마가 야속하고 억울했다. 유독 부산스러워 힘든 갓난아이를 내가 도맡아야 하는 상황이 별로 였다. 또 나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나는 내 품에 꼭 들어 올 정도로 작은 아기를 도저히 다룰 수 가 없었다. 아기는 꿈틀꿈틀 비틀배틀 내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보통의 아기답지 않게 힘이 너무 거세었다. 힘 좋고 성난 물고기처럼 버둥버둥 꿈틀댔다.

‘이상하다. 내가 아기를 보는 능력이 부족한가? 아닌데…. 왕년에 아기를 키워봤던 기억으론 내가 이렇게 아기를 못 다루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왜 이러지? 어떤 아이도 이렇게 까다롭지 않았어.’

아이가 계속 버둥거리자 짜증이 났다. 빨리 나타나지 않는 아이 엄마와 언니를 잔뜩 원망하며 한참을 기다리는데 언니가 돌아 왔다.

“아기 엄마는?”

언니의 말이 아기엄마는 별일이 없었지만 회복하기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해서 우리가 아기를 계속 돌봐야한다고 했다. 내 아이도 아닌데 웬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지친 나는 언니에게 아기를 잠시 건넸다. 그런데 언니가 아기를 테이블 같은 곳에 잠시 눕히자 아이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 아기를 떨어뜨리면 어떻해!”

나는 아이를 얼른 들어 올리며 언니를 꾸짖었다.

“앗! 아이 괜찮나? 큰일 났네. 이 사실을 아기 엄마가 알면 어떡하려고 그래?”

다행히도 아기는 괜찮아 보였다. 괜찮아야 했다. 아기가 잘못되어 아기 엄마가 이 사실을 알게 될까봐 두려웠다. 내가 잘 돌보지 않아서 생긴 일이지 않은가. 나는 불안에 떨며 변명거리를 찾아 우왕좌왕하는 신을 끝으로 나는 악몽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휴…, 꿈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 즈음에 Y를 케어 하는것에 부쩍 힘이 부치고 있었다. 그만큼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구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Y의 활동지원을 멈추게 되었다. 나는 그때 이 특이한 꿈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도 말을 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는데 결과적으로 그 꿈은 예지몽이 되어 버렸다.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도 별난 Y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을 보면 Y와의 일이 내게 적지 않은 쇼크가 되었나보다.


#2. 나의 변명


Y를 1년 정도 케어를 했을 때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 사이 Y의 체격과 체중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거의 나와 비슷하게 되었다. 아이는 새 학년이 되자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못하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스쿨버스 안에서도 점점 문제성 행동이 커져갔다. Y는 그 스트레스를 스쿨버스 안에서 풀기 시작했는데, 엉덩이에서 poo를 묻혀와 코에 대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을 자기 요구를 들어 주지 않을 때마다 자주 표출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냄새로 감각을 추구하는 것 같았다.

그러던 Y를 돌본지 1년 4개월이 된 어느 뜨거운 여름날, 사건이 터졌다. Y가 치료실에 가는 도중에 길바닥에 들어 누워 버렸다. 주변의 안전을 살피며 잠시 기다리려던 찰라,  poo를 손에 묻혀 코로 가져왔다. 날씨는 타는 듯이 뜨거웠고 자동차가 오가는 길바닥 위에서….

평소같으면 지켜보면서 차분하게 대처 할일인데 찻길이라 위험했다. 그리고 이 돌발 행동에 나도 적지 않게 당황해서 급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안전한 곳에서는 Y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준다. 그러면 제풀에 꺾인 Y가 스스로 일어서고 다시 걷는다. 억지로 일으키면 Y를 더 자극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제빨리 Y의 겨드랑이를 끌어 안아 일으켰고 Y는 거세게 반항 했다.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Y가 몸이 작다면 번쩍 안아서 데리고 가면 될일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Y는 45키로가 넘는 어른 체격이 되어 있었다. 진작에 내 육체의 한계를 감지 했었지만 '괜찮겠지 괜찮겠지'하며 견디고 있었던 내자신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Y의 poo가 묻은 손을 잡지 못했고 겨드랑이 아래쪽 팔뚝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Y를 통제하기 위헤서는 내 손의 힘을 더 주어야 했다. ‘여기를 잡으면 금방 멍이 들 텐데… 팔뚝 안쪽 살이란 얼마나 연한 살이던가…’

나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어 바둥거리는 Y의 손을 닦아 주었고 Y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대로 팔뚝을 잡고 치료실까지 갔다. Y가 치료실에서 옷을 입은 체 실수 한 변을 치우고 변을 주물럭거린 손가락을 물티슈로 하나하나 닦아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었지만 이날의 나는 poo가 묻은 Y의 손을 도저히 그냥 잡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쌓였던 스트레스와 짜증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에는 돌발행동을 하면 그때는 손이나 손목을 잡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이미 Y에게 내 마음이 떠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인내하고 참았던 노력들이 여기서 무너지겠구나, 감지되었다. 예상대로 팔 안쪽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다. 나는 그 멍을 보는 순간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그리고 심하게 짜증스러워하던 나의 정신적 한계와 육체의 한계를 마주했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 바로 Y의 엄마에게 그날의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하며 Y를 더 이상 케어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그만 두었다. 아이의 엄마도 주변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된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라고 말을 했지만 내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 일로 며칠 동안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그 일을 겪고 보니 돌봄 노동이 왜 힘든 것이고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비로소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돌봄은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환자의 모든 것을 다 흡수하고 버텨낼 정신력과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체력은 딸렸지만 정신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다짐해왔던 정신력이 의도치 않게, 나도 모르게,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만 것이다.

공교롭게 그 즈음 장애인 학대논란의 일들이 뉴스에 많이 보도되었는데 나는 왠지 내 처지가 중첩 되면서 내내 괴로웠다. 내 인격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혹시 그들에게도 나름의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던 건 아닐까, 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려면 그 모든 것들을 인내하고 참아야 하는 것인데 자꾸 핑계를 대고 싶었다. 그래서 나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다보니 돌봄 노동자들의 형편없는 처지가 내 눈에 훅 들어왔다.

‘과연 일어난 모든 일들의 원인이 문제를 일으켜 비판을 받는 그들만의 잘못일까?’

처음 일을 겪었을 때 그들도 나처럼 괴로웠을 것이다. 분명 자신의 체력과 마음의 한계를 알아채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알고도 먹고 사는 일을 포기할 수 없어 물러설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루를 버티고 또 하루를 견디다 자신도 모르게 결국 마음이 무뎌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사회에, 사람들에게 비판받는 잘못된 순간이 왔을 것이다. 모두의 경우는 아닐 수 있겠지만 이런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한계를 알고 돌봄의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여건으로 겨우 겨우 참다가 번 아웃이 되어버리는 상황 말이다.

돌봄 관련 종사자들이 심심치 않게 문제를 일으켜 뉴스에 보도되는 것을 보게 될때마다 나도 어쩜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그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분명 사회복지사의 길을 선택했다면, 남다른 마음과 사명같은 것이 있었을텐데, 유아교육이라는 힘든 공부를 선택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 안에 분명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을텐데, 그들은 왜 그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그 속을 면밀히 들여다본다면 돌봄 노동 종사자들의 노동인권이나 환경 또는 처우가 불합리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물론 나의 부족함을 부인하고 변명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그나마 쇼크가 왔을때 멈출 수 있는 환경에 있지만 생계를 위해 멈출 수 없는, 휴식을 취할 수 없는 노동자가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일 뿐이다. 나는 이제 피할 곳 없는 돌봄 노동자들이 장애인들 만큼이나 가엾어 보인다.


2021. 9. 6 作


이전 27화 키 작은 사람들의 연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