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signer MYO Sep 11. 2018

day 1. 내가 입국심사에 걸릴 줄이야..

서울에서 클리블랜드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징조가 좋지 않았다. 표를 예약해준 곳에서 내 이름과 성을 바꿔서 입력하는 바람에 한국 도심공항에서 체크인을 할 수 없었고 덕분에 3개월 치 짐이 든 가방 두 개를 질질 끌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서 내가 아는 모든 레지던시 관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WhatsApp으로 연락하고, 한국에 있는 항공사와 통화하고, 미국에 있는 본사에까지 전화를 걸며 이른 새벽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을 방해하는 민폐녀에 등극. 그래도 예상보단 재단 측에서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 겨우겨우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 뒤로 12시간을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드디어 미국에 도착.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들떠있었다. 앞으로의 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클리블랜드 재단에서 입국 비자에 대해 걱정할 때도 최근 2번의 미국 입국 모두 문제없었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너무 걱정을 해서 나도 걱정을 해야 하나 싶었을 정도.

그런데 입국 심사에 걸릴 줄이야..


한 줄로 압축하자면 작은 불운들이 일시불로 밀려와 파산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상세하게 하소연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후 내용이 아주 길므로 시간적 여유가 있으실 때 읽으시길 권장합니다...)


1. 입국 심사 전에 옆에 있는 기계에서 이스타(ESTA) 비자와 지문을 확인하고 확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역시나 내 지문은 인식이 되지 않았다. 물론 확인증도 받을 수 없었다.

(난 지문이 약해서 한 번에 찍히지 않는다. 어딜 가든 2~3번 정도 해야 인식이 되는데 이건 흔한 일이라 이때까지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2. 앞에서 심사를 받던 한국인 아주머니께서 입국 심사관이 여러 번 지적을 했음에도 계속 다른 라인에서 심사를 받고 있던 사람과 대화를 하는 바람에 심사관의 분노 게이지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보았다. 점점 빨개지는 그의 얼굴과 실룩거리는 얼굴 근육을.

(아.. 뭔가 느낌이 싸해지기 시작했다..)


3. 확인증을 받지 못한 상황을 설명하고 심사관 앞에 있는 지문 인식기에서 다시 지문 인식을 시도한 결과, 네 번째 만에 겨우 성공했다.  

(뭐,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4. 얼마나 있을 예정이냐고 해서 11월 30일까지 3개월 정도를 묵을 예정이라고 하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산을 해보기 시작한다. 이스타 비자로 왔기 때문에 90일 이상 미국에 체류할 수 없는데, 내가 머무는 기간이 90일이 맞는지 확인해보는 거다.

(설마 그것도 확인 안 하고 비행기 표를 끊었을까..-_-;;)


5. 그러더니 결혼은 했냐고 물어서 하지 않았다고 했더니, 왜 안 했느냔다.

(뭐라고...? 의도는 알겠으나 그래도 이런 어이없는 질문을 면전에서 하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침착하게 웃으며 대답해줬다.)


6. 3개월 동안 무엇을 할 거냐고 해서 클리블랜드에서 아티스트로 초대받아 가는 중이라고 설명을 하며 출력한 자료를 보여주려는데... 갑자기 사무실로 들어가잖다.

그러더니 나를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본인은 퇴근을 하는 것이다..!

(아... 그래.. 여기 미국이지.. 암암 퇴근하셔야죠..

다음 비행기를 타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스멀스멀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7. 새로운 사람이 와서 결혼 여부를 또 묻더니, 남자 친구는 있느냔다. 한국에 있다고 했더니 연락처와 이름을 적으란다. 하.. 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약간의 영어 실력과 출중한 센스를 탑재한 친구의 이름을 살포시 적어줬다.

(친구야 미안하다... 어차피 연락은 안 할 거야..ㅋㅋ)


8. 그러더니 다시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는다. 데이터 시각화 아티스트로 초대되어 클리블랜드에서 다른 아티스트들과 함께 지역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해주곤, 재단에서 보내준 초대장과 자료들을 보여주는데 데이터 시각화가 뭐냐고..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고 나니, 그게 왜 아트냐며..

(하.....)


9. 말문이 막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니, 이번엔 왜 내가 해야 하느냔다.

("그건 초대한 사람들한테 물어야지 이 사람아"하고 싶었지만,)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장착하고 한국에서 그런 일을 하는 전문가라고 했더니 내 작업을 보여 달란다. 그래서 회사 포트폴리오 사이트 주소를 알려 줬는데, 이런... 갑자기 주의 요망이라는 문구가 뜨며 사이트가 열리는 않는 거다.


이때부터 의심의 눈초리 집중 가동. 노트북을 열어서 작업을 보여줬더니 "이건 그래픽 디자인 아니야?" 한다..

(아.. 나는 누구인가.. 지금 여긴 어디인가..)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이런 분야를 데이터 시각화, 인포그래픽이라고 불러..." 했더니 이번엔 재단 연락처를 알려 달란다.

(아까 내가 "재단 연락처를 알려줄까?"라고 물어볼  기다리라 더니.. 진작 이럴 것이지...!)


10. 그러더니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갑자기 재단에서 보내준 자료들을 들고 옆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동안 연락처를 찾으려고 스마트폰을 손에 들었는데 'No, Phone'이란다. 당연히 옆 사람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는데, 'No, Phone!!'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네가 연락처 물어봐서 찾아보는 중이야"라고 했더니 계속하란다.

(하아.. 그래.. 스마트폰을 써도 될지 묻지 않은 내 잘못이다....)


11. 드디어 내가 알려준 담당자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받지 않는단다. 대표자 번호를 다시 알려줬는데, 그것도 받지 않는단다. (딱 점심시간이라, 불안하긴 했다. 역시 불안은 현실로.) 어쩔 수 없이 둘 다 잠시 소강상태...


12. 이번엔 뜬금없이 여권은 어디 있느냔다.

"여권? 여기 들어올 때부터 내가 갖고 안 갖고 있었지. 날 여기 데려온 사람이 너한테 줬잖아" 그랬더니 내 여권이 없다면서 찾고 난리다. 그러면서 나를 의심하는 눈치로 쳐다본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지금 내 여권을  어떻게 할 수나 있겠냐며...)


몇 분 후, 그는 본인이 바닥에 떨어뜨린 여권을 몸소 찾아내시었다. 그때 마침 전화기가 울렸고, 담당자와 통화를 한 그는 나를 내보내주면서 다음 비행기는 탈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저쪽으로 가란다.


나이가 많은데 결혼을 하지 않은 게 문제고, 이스타 비자로 너무 오래 체류하는 게 문제고, 데이터 시각화 디자이너인 게 문제고, 하필 그 순간 우리 사이트가 열리지 않은 게 문제고, 재단 담당자가 전화를 바로 받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그래..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이렇게 뭐도 안 되는 날이 있지..

액땜 한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디트로이트에서 클리블랜드행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했다.

Thanks, god!




+ 이후 나와 같이 인터내셔널 아티스트로 초대되어 독일 베를린에서 온 알시노(Alsino)도 같은 공항에서 입국 심사에 걸려서 초대장과 자료를 보여줬는데, 며칠 전에 똑같은 거 보여준 한국 여자애도 여기 다녀갔다며.. 뭔지 들었다고 가도 된다고 했단다. (나의 인내심 넘치는 긴 설명과 지치는 대화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그나마 다행 ㅋㅋ) 당시엔 만나본 적도 없는 나에게 고맙더라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던 알시노 왈.

"그런데 그 사람은 여전히 데이터 시각화가 뭔지, 우리가 뭘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어.."

......

덕분에 둘이 한참을 웃었다는 후문입니다..^^





이전 01화 day 0. 가자! 미쿡으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