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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속에서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존재인가?

내 인생의 가장 완벽한 순간

by 정강민 Mar 22. 2025

수영장의 염소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무려 4개월 만이었다. 샤워를 하며 수영모와 수경을 단단히 착용한 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인마다 ‘중간속도’, ‘느린속도’, ‘빠른속도’, ‘강습’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고, 빨간 옷을 입은 안전요원들이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걸어 다녔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건넨 후, ‘빠른속도’ 레인으로 몸을 담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상체를 물속으로 밀어 넣고, 두 다리로 레인 벽을 힘껏 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속은 주변의 소리를 차단한 고요한 진공 상태다. ‘내가 다시 수영을 하고 있구나!’ 팔을 저으며 힘차게 발길질을 했다. 하지만 중간쯤 도달했을 때, 갑자기 허벅지 뒤쪽이 뻐근해졌다. 축구 선수들이 햄스트링 부상을 당해 절뚝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어깨 근육에서도 찌릿찌릿한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예전 같지가 않군!’ 몇 달간 사용하지 않은 근육들이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가까스로 레인 끝에 도착한 나는 근육을 주무르며 다른 사람들의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용히 ‘느린속도’ 레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자유형을 시작했다.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몸을 돌려 배영을 시도했다. 수영장 천장을 바라보며 나아갔지만, 속도를 내려고 팔을 빠르게 돌리는 순간 얼굴이 물속으로 잠기면서 입안으로 물이 확 들어왔다. 깜짝 놀라 허겁지겁 몸을 돌려 다시 자유형으로 바꿨다.    

 

집의 샤워 시설이 고장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찾은 수영장이었지만, 전날 밤 수영복과 수경, 수영모를 챙기면서 어릴 적 소풍을 앞둔 듯한 설렘이 스며들었다.     


약 40분간 수영을 한 후, 나는 어린이 풀장 옆에 앉아 숨을 골랐다. 내 얼굴이 창백해 보였는지 안전요원이 다가와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네, 오랜만에 운동하니 많이 힘드네요.” 그렇게 말한 뒤, 원래 목적이었던 샤워장으로 향했다.     


깨끗이 씻고 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순간이야.” 이런 기분을 맛보는 것은 정말 엄청나다. 어떤 일을 완수하고, 멋진 결과물을 내거나,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완벽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심지어 로또에 당첨된다면 완벽한 순간이라 느낄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수영 후 이토록 충만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마도 수영이 주는 완전한 몰입 때문일 것이다. 스타트 지점에서 종료 지점까지 가는 동안 일상의 걱정거리나 잡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직 저기까지 가야 한다는 생존본능만이 존재한다. 몸을 움직이는 몰입의 과정이 신체를 건강하게 만들고, 샤워로 깨끗해진 뒤 밀려오는 상쾌함이 더해지면서 완전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결국,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은 온전히 하나의 행위에 빠져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못할 때다. 책을 읽다 어느 순간 몰입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온 마음이 그에게 가닿을 때, 소풍 전날 밤 설렘으로 가득 찰 때. 이런 순간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순간이다.  

   

몇 달 전부터 ‘운동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만 맴돌았지만 선뜻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수영장에 갈 때 유용할 것 같은 수영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도 저렴해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그런데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흥미롭게도 샤워장에서 한 사람이 내가 주문한 것과 같은 가방을 사용하고 있는 걸 보았다.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제품이었다. ‘실제 크기는 저 정도구나!’라고 생각하며 가방을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큰 결심과 의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작은 물건 하나가 시작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수영 가방이었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주 작은 행동들조차 하나의 목표를 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목표를 향한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방향성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작은 수영 가방이 나를 다시 운동으로 이끌었던 것도 결국 내 마음속에 이미 운동을 향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미룰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저항’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목표가 너무 커 보이거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첫걸음을 내딛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황제 아우렐리우스도 아침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나는 이불속에서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태어난 존재인가?’ 그는 로마 황제라는 권력을 가지고도 침대 속 안락함에 머무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노력하고, 그 가치를 삶에 반영하며, 타인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를 스토아 철학자들은 강조한다.  

    

세네카는 ‘사소한 행동도 꾸준히 지속되면 결국 큰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거창한 목표보다 작은 실천이 더 지속 가능하다. 하루 한 시간 헬스장을 가겠다는 결심보다 집에서 10분 운동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하루 한 권 책을 읽겠다는 다짐보다 하루 다섯 줄 읽는 것이 더 실천 가능하다. 무엇을 시작하려는 이들에게는 작은 물건 하나를 정성스럽게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그것만으로도 시작의 에너지가 발동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팔과 허벅지 근육이 뻐근하다. 하지만 그 묵직한 피로감마저도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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