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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Jul 01. 2020

싸우는 순간에도 다정한 너

참 다른 우리가 만나서

1.

출근길에 이것저것을 둘러보다가, 싸우는 순간에도 "거기 햇빛 비치니까 이쪽으로 와서 얘기해"라고 얘기하는 다정함을 좋아한다는 글을 보고, 그도 이런 류의 다정함을 지니고 있구나 생각했다.


회식으로 알콜이 살짝 들어가기도 했고 시간 맞춰 날 보러 와 준 애인이 너무 예뻐 보이기도 해서 기분 좋았던 순간도 잠시. 당시 간극을 좁히지 못했던 어떤 문제를 알게 되어 그에게 홍대 사거리 그 인파 많은 곳에서 화를 냈다. 그렇다고 화를 내는 방식이,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이라도 쳐다볼 정도로 소리를 지르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안에 엄청난 분노가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겨우 참고 있었던 기분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런데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은 잘못한 것이 없어 사과하기 힘들다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다툼은 확실히 둘의 가치관이 많이 달라서 발생된 것이었다. (지금은 서로의 간극이 많이 좁혀졌고 이해되어, 저와 비슷한 문제로 화가 나거나 싸우게 되진 않는다) 나도 기본적으론 다정하고 친절하게 말하지만, 어지간히도 빈말은 못해서 빙썅(빙그레 썅년...)이라 불릴 정도로 웃으며 뼈 때리는 멘트도 잘하는 타입이라 주변인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어쩌다 나랑 똑같은 사람을 만나서 이 고생인가 싶다가, 나 혼자 화내는 방식으로는 이 대화가 이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일단 얘기할 수 있는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전거를 끌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왔다. 나는 도착해야 할 장소를 찾지 못한 채 씩씩대며 앞서 걷고 있었는데 그는 뒤에서 “거기 아니고 그다음에 건너야 해요”하며 차근차근 길 안내나 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이렇게나 화가 나서 이 블록에서 코너를 돌아야 하는지 다음 블록인지 인지할만한 정신조차 없는데 자기 혼자 저렇게나 차분하다니. 정말이지 더 화가 났다.


겨우겨우 장소에 도착해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했고 이런저런 점 때문에 화가 났고 앞으로 우리가 이 정도의 합의점은 찾아야 할 것 같다고, 하고 싶은 말을 우르르 쏟아냈더니 그는 다 알겠다고 앞으로 바꿔보겠다고 했다. 드륵드륵 화낸 내가 무색하게시리 너무 쉽게 대답하는 그를 빤히 봤다. 그러자 그는 “더 얘기하고 싶은 거 없어?”라고 묻기만 한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까 뒤따라 오기만 하면서 무슨 생각했어?”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너무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고 덕분에 그가 더 좋아졌다.


"우리 여름이 구두 신고 너무 오래 걸으면  아플 텐데 어쩌지, 하는 생각을 했어"



2.

나는 커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는 타입인데 그는 반대로 달달한 밀크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난 까페라떼는 즐겨마셔도 밀크티나 티라테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가 좋아하니까 밀크티로 유명한 집을 열심히 검색해서 함께 들르곤 했다. 그러다 냉침해서 파는 밀크티 집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론, 괜찮은 찻잎을 사서 직접 밀크티를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간단한 과정을 거쳤을 뿐인데 이렇게나 맛있다니! 새삼 신기하고,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테지만) 행복했다.


얼마 전에 들른 빵집에서도 (예상치도 않게) 밀크티가 무척이나 맛있었다. "와, 여기는 밀크티까지 맛있네"하는 내게 언제나처럼 그가 얘기한다.


"나는 근데, 여름이가 만들어준 밀크티가 제일 맛있어"


3.
그와 나는 지나간 연애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는 편이다. 과거의 나는 이렇게 살아왔어, 라는 걸 알려주는데 빠질 수 없는 얘기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이런 얘기를 잠깐 나누다 내가 "네 다음 사람에게는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얘기하려나?"라고 하자 그는


"다음 사람이 어딨어~ 네가 마지막인데"란다.


너무 정답이라 누군가에게는 놀랍지 않을 수 있지만, 그는 빈말조차 잘하지 않는 타입이라 이런 얘기가 바로 나오는 게 좀 좋았다. 아니 좀 많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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