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책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를 좋아했으면>에 담겨져 있지 않는 글임을 미리 알립니다.
4월 1일만 되면, 특히 그 날짜가 되는 자정이 되는 순간 문자를 보내면서 장난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등학생 때에는 이성 간에 묘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문자메시지가 자주 왔다 갔다.
만우절.
거짓말을 합당하게(?) 하게 되는 날.
친구들끼리는 여러 가지 장난을 치기도 하고, 최근에는 사업용으로 이벤트성으로 이용을 하곤 한다.
개인적으론 만우절을 정말 싫어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문자를 주고받고 하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알고 지내는 이성이 그 친구 한 명이다 보니, 나 스스로에게는 살짝 더 각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친구사이를 유지하던 도중,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가 있었는데,
그 날이 바로 만우절이었다.
그 친구는 4월 1일이 되는 새벽 0시가 되자마자 나에게 그런 문자를 보냈다.
[나, 사실 너 좋아해. 진짜로.]
그 문자는 충격이라고 해야 할지 생각하지도 못한 말에 당황하게 만들었고, 문제 메시지 밑에 적힌 발송 날짜에 4월 1일을 확인하고 나는 이게 장난이라고 확신하고 답장을 했다.
[만우절이라고 장난치고 있냐. ㅋㅋㅋ]
그리고 답장이 곧바로 돌아왔다.
[장난 아닌데? 진짜야.]
그 말에 한동안을 그 문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5분인지 10분인지 계속 그 문자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왜 그래? 무시하는 거야?]
답장이 없는 내가 답답한 건지, 당황하고 있을 나를 상상하면서 자극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걸 장난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상당히 복잡했었다.
그저 ‘만우절 장난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길 수도 있었다.
굳이 4월 1일이 되자마자 이런 말도 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장난이면 왜 그리 복잡하게 생각했던 건지 웃프기도 했다. 그저 장난에 놀려도 상관없었고, 진짜 좋아해 줬다면 사귀었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땐 마치 초등학생이 놀림감 대상이 되는 것 마냥, 어째서 인지 당당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이러했다.
늦은 새벽이라 자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다음 날 아침 그 아이는 그 만우절의 고백에 대해 아예 모르는 척을 했다.
그걸 느낀 순간, 나도 그냥 ‘장난이었구나’라고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 이야기는 다시는 꺼내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나 장난을 치고 싶었던 걸까.
그런 문자를 받았던 시절 당시에는 카카오톡이 없었다.
그저 문자메시지가 전부였는데, 그때 정말 답답한 것은 답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 톡에서 상대방이 나의 메시지를 읽었는지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저 메시지를 보내고 받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상대방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답장이 없다면 읽고 안 보내는 것인지, 안 읽은 건지 답답할 때가 많았다.
특히 중요한 말을 담긴 메시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데, 답장이 오지 않으면 그만큼 답답한 것도 없었다. 적어도 그 상대방이 내 메시지를 읽었는지 만이라도 알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심정대로라면, 정작 고백을 하고 반응이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문자를 다시 보낸 그녀의 모습이 그려질 것 같았다.
그때는 내 입장의 생각으로 복잡했으니까, 그녀의 입장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고백이 만우절에 나온 게 아니었다면, 그렇게 까지나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되려 만우절에 했기 때문에 이게 진심인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지금은 사람의 마음을 전하고 얻는 게 어려운 것을 아는 만큼, 만우절에 고백을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고백은 하고 나면 정말 별거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별거 아닌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가 정말 힘들기도 했다.
우선적으로 고백 후와 고백 전의 사이가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이 먼저 되기 때문이었다. 결과가 좋으면 좋겠지만, 나쁘면 나쁜 쪽으로도 얼마든지 최악으로 까지 상상할 수 있었고, 긍정적인 결과보단 부정적인 결과가 더 앞서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마음을 얻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닌 만큼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 겁을 먹고 고백을 하기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은 특별한 날에 힘을 빌려 용기를 내보려 한다.
상대방의 생일이나
그 사람과의 특별한 기념일에,
또는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기념일인
크리스마스에,
밸런타인데이에,
화이트데이에,
또는 빼빼로데이에,
그리고 만우절도 포함되어 있다.
크리스마스나 화이트데이, 밸런타인데이는 연인들의 기념일이라는 느낌을 주게 하는 날이었다. 물론 크리스마스는 예수님 탄생일이고 밸런타인데이는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의 날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날에는 연인들의 거리로 만들고, 연인들끼리 분위기 내기 좋은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새로운 커플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 날을 기회 삼아서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그래서 그런 특별한 날은 연인들을 위한 날이기도 하면서, 연인이 되는 사람들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
그건 평소의 평범한 날 보다, 조금 더 타인의 마음을 쉽게 표현할 수 있고,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절은 다르다.
만우절은 정말 핑계대기 좋은 날이다.
만우절은 거짓말을 마구 하는 날이다. 다들 알면서도 거짓말에 속아주기도 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나와 그 주변 사람들은 만우절의 그런 속성을 이용해 이성에게 고백을 하고, 차이면 만우절이라서 장난쳤다고 둘러대기도 한다.
즉 까이더라도 만우절로 밑밥, 핑곗거리로 도망칠 수 있다.
"오늘 만우절이라서 장난친 거지."
말 그대로 장난으로 시작해서 장난으로 받아들인다면, 복잡함 없이 매듭을 지을 수도 있겠지만,
"만우절이라서 장난친 거였는데, 정말 진심이었던 거야?"
진짜 장난을 친 고백에 진심으로 다가온 사람 또한 있기도 있다. 사실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진심이라고 받아들인 만큼 이끌렸을 수도 있다. 그 마음에 장난이었다는 사실만큼 잔인한 건 또 없다.
창고에 살펴보면, 이제 충전기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휴대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내가 고등학생 때 쓰던 휴대폰이었다. 카카오톡도 쓸 수 없고, 화면도 작은 휴대폰. 반대로 지금은 휴대폰이나 PC 메신저가 아니더라도 SNS으로 누군가가 어떤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볼 수도 있다.
그 변화의 세월은 10년에 가까웠고, 만우절 장난을 쳤던 만큼의 사이였던 그녀와 내가 다시 만났을 때에는 그때만큼 친근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의 만우절, 나에게 고백을 한 사람을 성인이 되어서야 다시 만났을 때에는,
당연스럽게 서로 이성으로서의 마음은 없었고, 오랜만에 만난 만큼 어색함이 가득했다. 그 어색함 속에서 이유 없이 스마트폰의 화면을 살펴보던 도중, 4월 1일이라는 그날의 날짜를 발견하게 되었다.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수년 만에 마침 만난 그 날이 만우절인 주말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물었다.
"그때 왜 모른 척을 한 거야?"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서 그냥 툭 던진 질문이었지만, 왠지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더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만우절이라고 장난을 친 거라고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완전히 모르는 척을 했던 것에 나는 나대로 궁금하기도 했었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말했다.
"그때 제때 답을 해주지 않아서… 비록 하룻밤 사이였지만 만우절을 빌려서 그렇게 고백하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창피하더라. 그래서 모르는 척을 했어."
그리고 그 사람은 살짝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그런데, 너도 모른 척하고 있었잖아. 내가 싫었어?"
마치 나를 약 올리듯이 더 웃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싫었던 게 아니다.
그때의 나는 ‘굳이 왜 만우절에?’라는 사실에 트집을 잡으면서, 정말 나를 좋아해 주고 있었던 것인지 나 자신에게는 물론, 진심이든 장난이든 받아낼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진심이었다면 진심인 그대로, 거짓말이라면 거짓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이 없었어.”
그녀 또한 만우절을 핑계로 고백을 했다고 한들, 나 또한 만우절로 핑계로 스스로에 대한 부족한 용기에 도망치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정말 아무런 것도 아니다.
장난이었으면 어땠다고…
그렇게 우리 둘이는 또다시 서로를 볼 일이 없었다.
예전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카카오톡으로 고백을 하고 바로 사귀기도 한다는 말도 들었지만,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방식에 그다지 호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찌 보면 길을 가다가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바로 물어보려고 하는 사람보다는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인터넷 상에서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가고 싶어서 이것저것, 그 사람에 대한 것을 알 수 있고 알게 될 수 있으니.
하지만 분명 그런 메시지로 마음을 전하는 방법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 한계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성의가 없다며 오히려 질색하는 사람도 있다.
고백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진심을 전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고백을 받는 사람도 마냥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적어도 진심을 느낀다면.
전하려고 하는 사람 또한 용기를 내고 어렵게 입을 뗀다. 만우절이라는 자신의 방어수단을 만들어 무서움에서 도망가는 힘을 빌려서라도.
그 사람은 그것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 말이 어째서 인지 그때는 물론 그 말을 듣는 그 순간도 뭔가 풋풋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그때도 고백을 하고 마음을 전하는 것에는 늘 두려움이 존재한다.
어리든 성숙하든.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만우절에 장난으로 거짓 마음을 전하는 건 싫어했기에, 만우절의 고백을 싫어했다. 하지만 그런 거라도 있어야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면, 이젠 응원하고 싶다.
나 또한 화이트데이를 기회 삼아 용기 내어 고백을 하기도 했으니.
그렇다고 마냥 다 성공하는 것 또한 분명 아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