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L 생수는 보통 하루면 동이 난다. 하지만 나는 갈증을 참아가며 이틀을 버텼다. 이제 목욕하는 것은 사치가 되었다. 몸에서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3일째 날이 되었다. 쓸데없는 설명인 것 같지만 이곳 방공호에는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달력조차 없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는 것을 기록을 해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아마 정확할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 시도해 보지만 여전히 수도꼭지에 물은 새어 나오지 않는다. 나는 혹시 모를 생수가 다시 문쪽에 있을까 기대하여 찾아갔다. 계단에 전부 올라가기 전에 생수가 눈에 띄었다. 이번엔 2L들이 생수 18개였다. 이 정도 양이면 최소 18일, 최대 한 달 이상을 버틸 수 있었다. 두 번째 생수를 받아들이자 처음에 생겼던 의문이 사라지고 생수 배급은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 누군가 문을 열고 생수를 가져다준 것이 분명한데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문을 열거나 생수병을 놓으면서 생겨날 소음조차 들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나의 한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베이크드 빈 59개와 참치캔 62개를 썼으며 생수 18병을 소진했다. 그동안 나는 매일 1.5회 주기로 50회 이상 수도꼭지를 돌렸고, 안정되고 지루한 삶의 충실한 동반자인 성경을 읽었다.
2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내 모든 산 중에서 그를 칠 칼을 부르리니 각 사람이 칼로 그 형제를 칠 것이며 22. 내가 또 전염병과 피로 그를 심판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무리와 그와 함께 있는 많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 하리라 23.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 에스겔서 38장
그렇게 물을 두 번째로 다 써버렸다. 이제 계단으로 다시 올라가야 할 차례이다. 그런데 갑자기 생수를 받은 이후 꺼버린 라디오 전원을 켜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두 번째 버튼을 누르자 침묵이 흘렀다. 10초쯤 시간이 지나고 지난번 말 했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문을 여세요."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였다.
나는 깜짝 놀라 라디오의 전원을 반사적으로 껐다. 침묵으로 잠겼고 고여 있는 대기 중에는 분뇨 더미와 음식물 쓰레기, 씻지 못해 나는 자신의 체취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악취만 감지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었기에 나는 계단으로 필사적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그렇게 문 앞까지 다가서자 정말로 생수는 없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은 도어록이나 자물쇠가 채워져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반 가정집의 문처럼 열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기 전에 한 번 귀를 문에 대고 밖에 누군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방공호만큼이나 고요했다. 그런데 별안간 문에 댔던 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생명체를 느낄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귀에서 그 무언가를 떼어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애벌레들이 문과 바닥 사이의 빈 공간을 타고 올라갔던 것이었다. 내가 서있는 바닥에도 애벌레가 셀 수 없이 많이 있었다. 나는 끔찍한 이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단을 통해 방공호로 황급히 내려갔다.
나는 다시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긴 침묵이 흘렀다. 이번엔 아무런 조언도 없었다. 나는 신탁을 받는 심정으로 라디오의 메시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는 것은 전원이 켜져 있음을 알리는 붉은 점멸등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갈증은 참을 수 없이 커졌다.
나는 다시 결연한 마음을 갖고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내게 익숙한 참치캔의 날카로운 병뚜껑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는 문을 열지 않으면 수분 부족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계단을 향해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이윽고 2년도 넘게 굳게 닫힌 문 앞에 섰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고, 밝은 빛 덕분에 눈이 잠시 멀어진듯했다. 멸망한 세상이 이렇게 찬란한 빛의 축복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지옥 여행을 마치고 지상의 세계로 돌아온 오르페우스처럼 감탄한 뒤 발을 한 발짝 내딛자 쩍 하고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여름 햇살 아래 빠르게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노인의 사체가 있었다. 노인은 2L 생수 더미 옆에 고꾸라져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를 웬일인지 알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