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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물과 콜라의 상관관계

감기와 잔소리 사이에 선 아빠의 깨달음

by 피터의펜

아이가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정말 하루 종일 코를 훌쩍였다. 그냥 훌쩍 정도가 아니라, 어느 공간이든 자유롭게 개방된 상태라면 무조건 킁킁거렸다.


화장실에서도 훌쩍, 안방에서도 훌쩍, 거실을 지나가면서 훌쩍, 심지어 주방에서 키친타월을 뜯어서 코를 닦고 있을 때는 '아, 이건 제법 심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코 밑은 벌겋게 헐어서 따갑다고 징징대고, 그러면서 또 훌쩍이고, 또 닦는다. 참 묘한 게, 아이가 아프면 이상하게 그 소리 하나에도 아빠 마음이 조금씩 무너진다.


"아빠, 코가 안 나와."

"응? 계속 풀고 있잖아."

"근데 안 나와..."


여기서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까 한참 고민했는데 '그러니까 그게...' 하다가 말았다.


감기의 징조라는 건 사실 며칠 전부터 보였다.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서 길바닥이 얼어붙을 정도였는데 이 녀석은 반바지를 입고 뛰어다녔다. 왜 그렇게까지 다리가 시원해야 하는지 나는 평생 이해 못 할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을 때는 더 가관이다. 겨울인데 민소매 같은 반팔, 팬티같이 짧은 여름 잠옷 바지를 입고 거실에 늘어져 있는데 그 얼굴은 또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모른다.


학교 갔다, 학원 갔다 오느라 고생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겨울은 겨울 아니던가.


"추운데 겨울옷 좀 입어."

"괜찮아. 집 따뜻해."


여기서 더 말해봤자 싸움만 난다는 걸 안다. 기온이 떨어져 체온이 낮아지고 면역력이 어쩌고 하는 과학적 설명을 줄줄 펼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런 설명이 그에게는 그저 잔소리라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그냥 포기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목소리까지 걸걸해져 있었다. 순간 변성기가 하루아침에 온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이건 감기다.


그것도 제대로 걸렸다.


그래서 얼른 약을 찾았다. 예전에 받아둔 감기약이 있길래 살펴보니 항생제, 비염약, 위장약, 콧물약... 그때도 꽤 심했는지 약 구성이 화려하다.


약은 원래 습기에 약해서 오래 보관하면 안 좋다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그걸 제습제까지 넣어 밀봉해 가며 보관하겠는가. 냉장고에 넣어둘 것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한 번인데... 이 정도면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제법 그럴듯하게 나를 스쳐 지나갔다.


"이거 먹자. 증상 비슷하니까 잘 맞을 거야."


근데 아이가 또 버틴다.


"약 많아... 너무 많아..."


나도 안다.

많다. 진짜 많다.

그래도 이걸 줄일 수는 없다.

줄일 수 있는 건 고집밖에 없다.


결국 아이가 한 알 삼킬 때마다 나는 옆에서 시원한 콜라 한 잔을 들고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따뜻한 꿀차를 타주고, 어떤 부모는 배즙을 대령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콜라다.


뭐, 먹기만 하면 됐다.


목이 아무리 아파도 따뜻한 물은 절대 안 마시는 아이의 고집은 이번 생에 고쳐지지 않을 거 같다. 차라리 차가운 걸 마시면 병균이 얼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뭐 어때. 낫기만 하면 되지.


아이는 다시 코를 훌쩍였다. 약기운이 조금씩 도는지 얼굴이 살짝 지쳐 보였는데, 그 안에서 묘하게 '버티는 힘' 같은 게 반짝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약을 잘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아픈 하루를 어떻게든 견뎌낸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아빠라는 존재는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에서 마음이 툭, 하고 크게 흔들리는 거구나 싶었다.


오늘 하루를 정리해 보면, 약이 다섯 알이든 열 알이든, 잠옷이 여름 것이든 겨울 것이든, 코가 막히든 뚫리든,


결국 중요한 건 딱 하나였다.


아이의 감기가 빨리 낫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괜히 잔소리를 하고, 괜히 투덜거리다가도 마지막엔 결국, 콜라 한 잔 들고 아이 옆에 서 있게 되는 사람이 아빠라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빠의 부록조언


감기 걸린 아이에게 잔소리보다 필요한 건

따뜻한 말 한마디와 얼음 동동 콜라 한 컵이다.


아픈 날의 작은 위로가

생각보다 오래, 깊게

아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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