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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Sep 13. 2022

충분히 잘하고 있는거야, 너는

아기가 없을 때는 어느 정도 삶을 컨트롤하고 살 수 있었다. 시간을 분배해 쓸 수 있었고, 적은 월급이어도 그에 맞게 씀씀이를 맞춰나갈 수 있었다. 마음도 그랬다. 내비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감춰둘 수 있었고 안 좋은 마음은 다른 걸로, 이를테면 잠을 자거나 한없이 걷거나 하면서, 풀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내 손 안을 벗어나 버렸다. 시간도, 돈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었다.


이전 같으면 내비치치 않았을 마음들을, 말들을, 친구에게 하고 있었다. 너무 답답하다고, 다들 멋지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아닌 것 같다고, 마음이 너무 불안하다고.


육아를 하려면 머리를 말랑하게 해야 한다고, 육아란 게 인스타에서 보는 모습만 그렇지 현실은 힘들고 힘든 게 맞다고, 넌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다섯살 아이를 키우는 그 친구는 내게 말했다.


“아가들이 건강하게 태어나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부모가 다 옆에 있고, 세 가족이 함께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또 감사하는 마음,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서 기고, 걷고, 말도 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살아볼 수 있다는 것에 기대되는 마음, 그런 마음을 더 많이 가져보려고 노력하는 머리…”


마음이 바닥을 치던 날 아이를 데리고 30분을 운전해 친구집에 갔고, 친구가 준 편지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이 문구들을 보면서 예전에 “산다는 게 꽤 좋다”던 또 다른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그때 왠지 씁쓸함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기억. 삶에 대한 기대감, 사는 게 꽤 좋다고 느끼는 감정, 나는 그런 걸 느끼고 살았나. 이렇게 꼬이고 꼬인 세상에서, 이렇게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꽤 좋게 살 수 있지, 하는 냉소.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있단 걸 알았다.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기대가 내게 크게 없구나. 오히려 이 아이가 힘들 만한 일들, 예를 들면 기후변화랄지, 전염병이랄지, 그러면서 점점 각박해지는 사람들이랄지, 이런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그저 일상을 일구어 나가는 것에 대한 피로함, 그런 걸 남겨주는 게 안타깝다는 마음이 컸다는 걸 알았다. 이 세계에 대한 나의 비관이, 냉소가 보였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세계의, 자연의, 사람의 아름다운 구석까지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는 것인데. 마음의 뿌리가 깊고 흔들리지 않으면 그만의 색깔로 헤쳐나가고 살아갈 방법이 있다는 걸 안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저 말로만, 머리로만 생각했던 건 아닐까. 저 깊은 속마음은 그게 아니면서.


친구집에서, 냥이와 아기


일상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세상의 좋은 것들, 감사할 것들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지만, 저 마음속 비관을 꺼내놓는 연습을 자꾸만 하려고 한다. 언제나 나의 생각보다 더 잘 해내는 아기를 보면서, 이 아이는 나보다 훨씬 나을 거고, 단단히 살아갈 거란 기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


편지 속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생각보다 희생할 게 많아서, 생각보다 내 시간이 너무 없어서, 생각보다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새로운 과제들이 매일 버거워서, 책임감 때문에 힘들었고, 여전히 힘들지만", 아이가 이 세계에서 나보다 조금 더 행복하기를, 조금 더 쓰임 받기를 기대하는 마음, 그 마음의 근육을 더 키우고 지켜내는 게 나의 숙제가 아닐까.



잘하고 있는거야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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