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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a Aug 15. 2022

사랑은 변해도 회식은 변치 않는다.

10년 만에 재취업한 마흔두 살 경단녀 리사씨 5편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수는 은수에게 넋두리 하듯 말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리사씨는 사랑도 변하는 세상에 살며, 변치 않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탱탱했던 내 피부도 변했고, 영원히 살찌지 않을 것 같던 남편의 뱃살도 늘어져 버렸다. 전셋값도 올랐고, 애들 학원비도 올랐다. 떨어진 건 작년에 매수한 로블록스와 엔비디아 주식뿐.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니. 그것은 바로 회식이었다.

취업 전 리사씨는 남편의 회식이 부러웠다.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할 때 남편은 자주 회식에 갔다. 리사씨도 어른 사람과 밥을 먹고 맥주를 한잔하며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끔 울컥했다.


남들 다 돈을 벌던 2020년 동학 개미 운동에 결집하지 못한 것도 왠지 어른 사람과의 대화가 부족해서 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테슬라 주식을 사지 못한 건 왠지 나 혼자 같았고, 남들 다 하던 공모주 청약에 뒤늦게 합류한 것도 다 어른 사람과의 대화가 부족해서였던 것 같았다.


리사씨의 머리에 유독 기억에 남는 팀장 문어 부장은 회식에 있어서는 카리스마 뿜 뿜이었다.

퇴근 오 분 전 갑자기 "오늘 약속 있는 사람 없지! 회식이다!"를 외쳤다.

무조건 폭탄주에서 시작해서 술잔을 돌리기 시작하면 리사씨의 머리도 돌기 시작했다. 이차는 무조건 노래방이었다. 노래방에서는 반드시 문어 부장의 노래가 1번이었다. 비틀즈의 옐로 서브마린. 어쨌거나 무조건 원샷을 외치며 노란 잠수함을 외쳤던 첫 번째 회식 때 리사 씨는 문어 부장 차를 얻어 타고 집에 가던 중 '부장님 최고!'를 외치다가 뒷자리에 오바이트를 했던 지우고 싶은 과거를 가지고 있다. 어쨌건 리사씨의 회식은 둘째를 낳으면서 막을 내렸다.


사실 엄마가 된 리사 씨에게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에 맞춰 퇴근을 하려면 회식은 불가했다. 리사씨 친구들의 처지도 비슷했다. 아무리 맞벌이를 한다지만 보통 아이들의 주 양육자는 엄마가 된다. 마흔을 넘어서며 일보다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친구들도 회식엔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회식에 참가 가능한 친구들은 친정엄마 찬스가 가능한 축복받은 소수에 불과했다.


회사에 다니지 않던 10년간 회식 문화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기대감이 솟구쳤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친구 K양은 리사씨가 가끔 문어 부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말했다.


"야 너는 무슨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를 하니~ 요즘 그런 문화 없어. 우리 회사는 아예 회식이란 게 없어! 대신 기프티콘 보내줘 우리 보스는"


십 년 동안 우리의 회식문화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친구 K의 말대로 회식문화라는 것은 화석이 되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술잔을 돌리고 돌리고 있을까?


재취업 후 처음 맞이하는 회식은 회사 근처 삼겹살집이었다. 사람 수대로 삼겹살이 준비되었고, 맥주잔과 소수 잔도 세팅되었다. 갑자기 10년 전 회식 자리가 오버랩되었다. 비율에 맞춰 쫄쫄 쫄 따라지는 소주. 그 위에 황금비율 맥주. 돌아가는 술잔들. '어... 술 말면서 지금 내 컵이랑 김주임 컵이 바뀐 거 같은데? ㅠㅠ'


돌아가면서 펼쳐지는 건배사의 향연. 젠장.. 이런 줄 알았으면 #쌉인기건배사 라도 검색해올걸 그랬다.


메뉴부터 황금비율의 소맥과 건배사까지 왜 십 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 거냐!!


그리고.. 리사씨가 그토론 기대했던 어른 사람들과의 건설적인 이야기. 역사나 철학 재테크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자리만 옮겼을 뿐 업무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그나마 업무 외의 이야기라면 약간의 골프 이야기, 그리고 누가 누가 더 아픈가 내기 내기해보자 질병 무용담이었다.


리사씨가 10년간 규칙적인 운동과 각종 유기농 야채들을 먹고 있을 때 동료들은 퇴행성/스트레스성 질병들로 고통받고 있었다. A과장은 퇴행성 관절염, B과장은 지방간, C과장은 갑상선 항진증, D과장은 녹내장 초기로 정기 검진 중이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건강이 최우선이죠."

그 그룹 40~50대 중에서 유일하게 퇴행성. 스트레스성 질병을 가지고 있지 않은 리사씨가 말했다.

그 말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리사 과장. 스트레스를 안 받는 직장인이 어딨어요? 그냥 몸으로 받고 사는 대신 돈 받는 거지"


오늘의 회식으로 리사씨는 몇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1. 직장인은 모두 스트레스를 받는다

2. 직장인은 모두 스트레스성 질병을 가지고 있다.

3. 회식은 바뀌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에 리사 씨는 오랜만에 6급 공무원 J와 통화를 했다.


"J야 어떻게 이놈의 회식문화는 십 년 전이랑 바뀐 게 없니?"


"리사 야. 놀라지 마. 우린.. 이차로... 노래방도 가"


J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 정말이라고 답하면 너무 충격일 것 같아서 )

리사 씨는 얼마 전 뉴스에서 공무원들은 아직도 '과장 모시는 날'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돌아가면서 후배들이 과장에게 밥을 사는 날이라나.. 리사 씨는 혹시나 90년대 추억의 기사 인가하고 날짜를 살펴보았다. 분명 2022년의 기사였다.


과장 모시는 날, 회식, 소맥 그리고 건배사와 노래방. 중년의 친구 퇴행성 질병.

사랑도 변하고, 리사 씨의 젊음도 변했으며, 주식 잔고도 변했건만. 왜 회식은 변하지 않는 걸까.


지금 55세인 임원도 10년 전엔 45세였을 테고, 지금 45세인 과, 차장들도 10년 전엔 35이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미스터리였다. 리사 씨는 회식 내내 마치 10년 전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가위로 오려 이어 붙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변치 않은 건... 있었다.



10년 만에 재취업한 마흔두 살 경단녀 리사씨 이야기는 본격 '경단녀 성장소설'입니다.



https://brunch.co.kr/@cmosys/173

https://brunch.co.kr/@cmosys/174

https://brunch.co.kr/@cmosys/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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