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용재 Oct 02. 2020

dissolve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던 길 어디에선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이어폰을 뚫고 들어와 나의 귓가에까지 전달되었다. 가던 길을 멈춰 세우고 노래를 중지시켰다. 이어폰을 빼자 사방은 고요함에 잠겨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시 동안을 그렇게 가만히 서서 사방을 살폈다. 이따금 풀벌레 소리가 들려올 뿐 다른 소리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사람들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아래로 비치는 나무의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려 움직이고 있다. 그런 나뭇가지의 그림자는 바람에 흔들려 손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잘못 들은 걸까'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번 노래를 재생시키려고 할 때 또 한 번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조금씩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해간다. 이내 마주한 모습은 아직은 다자라지 않은 것 같은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인다. 눈이 마주치자 피할 법도 한데 도망갈 생각이 없는 듯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나 역시 그 모습이 신기해 잠시 동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몇 분이 지났다. 더 이상 울지 않는 모습을 보고 다시 집으로 향해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고양이는 내가 떠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다시 울기 시작한다. 고양이를 바라보며 "말을 해줘야 알지, 나는 잘 모른단 말이야. 내가 필요해서 나를 부른 거 아니니?" 그러는 동안에도 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일관돼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고양이를 상대로 뭐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알았어 너 혹시 배고파서 그러는 거니? 그런 거라면 잠깐만 기다려줄래? 금방 올 테니까 말이야" 그 말을 하자 고양이는 나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소리 내기를 멈춘다. 발걸음을 옮겨 편의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자리를 비우는 사이 사라져 버릴까 싶었기 때문이다. 곧장 한 코너로 향해간다. 고양이 통조림을 구매했다. 

다급하게 도착하자 다행히도 아직 그 자리에서 고양이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캔을 따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조심스레 앞에 내려두자 기다렸다는 듯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라보다가 이내 바닥에 앉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누가 안 뺏어먹으니까" 나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허공에 어떤 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인지 먹던 것을 멈추고 잠시 동안 나를 바라본다. 그리곤 또다시 먹기를 반복한다.

어느덧 시간은 밤 열두 시를 넘어가고 있다. 달빛에 비친 고양이의 모습이 보인다. 생김새가 특이하다. 이마에는 누군가 줄을 그어놓은 듯 대각선으로 선명한 줄이 보인다. 여느 다른 고양이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 번만 보면 기억할 수 있는 그런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너 꽤 신기한 모양을 하고 있구나" 고양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먹는 것에 집중을 한다.

바닥이 드러나자 고양이는 이제는 된 것 같다며 머리를 들어 올린다. 그리곤 나를 보고 한번 울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간다. "뭐야 너 어디 가는 거야 볼일 끝났다고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거야?"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고양이의 흔적을 드러내듯 고양이가 앉아있던 자리의 잔디들이 주변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고양이가 사라지고 나자 급격하게 피곤함이 밀려든다. 이제 그만 서둘러 집으로 향해가야겠다. 주변은 여전히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오래 전의 일들이 떠올랐다.

일곱 살 때의 일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심부름을 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집과 슈퍼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엄마와 슈퍼 주인분은 친한 친구이다. 베란다에서 창문을 열면 슈퍼가 보이고 슈퍼에서 우리 집을 바라보면 창밖으로 손을 내미는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엄마는 어린 나에게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아주 간단한 것들을 사 오게 하면서 먹고 싶은 간식을 하나씩 고르게 했다. 물론 내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엄마는 베란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슈퍼 아주머니 또한 가게를 나와 걸어오는 나를 바라봤다. "오늘은 두부 한모를 사는 거야 알겠지? 그리고 네가 먹고 싶은 간식도 하나 사고 거스름돈 잘 받아오는 거 잊지 말고" 

작은 비닐봉지에는 두부 한모가 담겨 흔들리고 있고 나머지 한 손에는 젤리를 든 채로 집으로 향해가고 있다. 먼발치에서 엄마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입모양으로 잘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아 발걸음이 빨라져 간다.

놀이터를 지나 아파트 화단을 지나갈 무렵,  또래의 아이들이 무언가를 둘러싼  웅성대고 있다.  아이의 손에는 나무 막대기가 들려있다. 다른 아이는 작은 돌멩이를 움켜쥐다 이내 무언가를 향해 던지고 만다. 집으로 곧장 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궁금증이 밀려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자 새끼 고양이  마리가 작은 소리를 내며 울고 있다. 아이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즐거운지 장난을 치고 있다.  모습을 보자마자 곧장   속으로 파고들어 고양이를 막아섰다

아이들은 나를 보며 "  하는 거야, 저리 비켜

엄마는 자신보다 약하다고 해서 괴롭히는 일은 절대  되는 거라고 했다. , "아들 엄마가 뭐라 했지?" ", 나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면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어" "그리고?" ", 동물도 마찬가지로 소중히 대해야 한다고 했어"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몇몇은 나보다 덩치가  컸기 때문이다. "괴롭히면  " 아이들은 일제히 비웃음이 섞인 웃음을 드러낸다.  아이가 대표로 말한다. "어서 비켜  비키면 네가 대신 혼날  알아"  순간 나는 아주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 젤리  줄게 이거 정말 맛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만해" 아이들은 내가 건네는 젤리를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일제히, 이제 재미없다 그만 가자 라는 말을 한다. 그리곤 내손에 들린 젤리를 낚아채 자리를 벗어났다. 아이들이 떠나고 남겨진 고양이를 바라봤다. "이제 괜찮아, 그런데  혼자니? 엄마는 어디 갔어?" 여전히 울기만  뿐이다. "그런데 나는 집에 가야  이것 , 심부름을 하는 중이거든 그러니까. 어서 너도 엄마를 찾아가 나도 이만 가볼게" 자리를 일어나자 고양이는 나를 따라오기 시작한다. "아니야, 따라오면  .  데려갈  없단 말이야" 여전히 따라오는 고양이를 두고  수가 없다.

벨을 누르자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보인다. "아들 생각보다 많이 늦었네? 친구들을 만났어?"나는 쭈뼛쭈뼛 말을 이어갔다. "응, 엄마 두부" "간식은 안 샀어? 먹고 싶은 거 사라고 했잖아" 그 순간 점퍼 안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가만히 있어, 들키면 안 된단 말이야" 내가 말을 하는 순간 엄마는 뭔가를 눈치챈 듯이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엄마한테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 나의 시선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엄마의 시선을 피하려고 한다. 그리고 근 순간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그날 밤 우리 집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주제로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울어보기도 하고, 애원도 해보는 것뿐이다. "엄마, 아빠 우리가 키워야 해요 밖으로 다시 보내면 큰일을 당할지 모른단 말이에요. 엄마가 그랬잖아요 나보다 약한 사람을 지켜줘야 한다고" 엄마의 표정은 난처해 보였다. "그건 그렇지만,, 엄마도 아빠도 고양이나 강아지를 접해본 적이 없는걸. 잘 들어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가족이 생기는 거지" 간절함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사랑해줄 수 있겠니?"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 아빠는 체념한 듯 "사랑으로 보살펴주겠다는 약속을 잊어선 안돼 알겠지?"

나는 큰소리로 대답을 하며 소파 위를 방방 뛰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나의 모습이 귀여운지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렇게 '젤리'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젤리는 우리 집에 온 뒤로도 몇 개월 동안은 가족들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만큼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부담스러울 만큼의 애교를 보였다. 마치 자신을 집에 데려갈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그리고 그 모습을 알아채고 데리고 온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듯이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최고의 친구가 되었다. 항상 잠자리에 들으려고 할 때면 어느새 내 곁으로 찾아와 한편에 누워 볼을 비벼대곤 했는데 나는 그런 표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엄마와 아빠는 곁을 주지 않는 젤리를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곤 했지만 몇 달 뒤 젤리가 애교를 보이던 날. 행복해하던 두 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젤리의 마지막 모습은 학교를 가던 나를 보며 인사를 하던 게 마지막이 되었다.

여름이면 현관문을 자주 열어두곤 했는데 젤리는 현관을 나가 복도를 어슬렁 거리다 돌아오기를 좋아했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다 알정도로 모두가 친하게 지낸 덕분에 젤리가 복도를 다니면 다들 반갑게 인사들을 해주곤 했다. 

평상시 학교를 가거나 다녀올 때면 내가 보았던 건 복도를 걸어 다니던 '젤리'의 모습이 전부이지만 내가 보지 못한 시간에는 다른 곳을 다녀왔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학교를 다녀온 뒤에 젤리를 찾자 엄마는 내게 "응 잠깐 나갔어 금방 들어올 거야"라는 말을 했고 나 역시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늦은 밤이 되어도 젤리가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모두 나서서 젤리를 찾아다녔다. 그런 일들은 한동안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끝내 찾았더라면 해프닝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이별을 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돌아올 거야 라는 간절한 바람을 더하다 이내 누군가 나쁜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더하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나자 어딘가에 있다면 잘 지내주길 바라는 마음을 더할 뿐이었다. 

혹여나 누군가 젤리를 데려간 것이라면 사랑으로 키워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젤리를 처음 보던 시점에서 이십 년이 훌쩍 지나있다.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지만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젤리에게도 조금 전에 보았던 고양이와 같이 특이한 줄무늬가 있었다. 왜 나는 줄무늬를 보자마자 알아채지 못했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뒤를 돌아보자 가로등의 불빛만이 나의 등 뒤를 비추고 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 오던 길에 마주했던 고양이는 사실 젤리가 다시 태어나 내 곁으로 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젤리와 같이 비슷한 무늬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아간다. 

하지만 이마저도 혼자만의 바람이 만들어낸 일들에 불과할 뿐이다.

줄무늬 고양이를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까.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젤리를 꿈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르자 반대편에서 뛰어와 나의 품에 안긴다. 잠자리에 들 때면 볼을 비볐던 것처럼 나의 볼에 자신의 볼을 가져다 댄다. "너 어디에 있었어? 우리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걱정스러운 말 사이로 내 말은 알아들은 건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집에 오던 길에 한 고양이를 만났어 그 순간에는 떠올리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랑 비슷한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더라고 혼자서 별생각을 다했지 뭐야, 혹시나 네가 다시 태어나 내 곁으로 찾아온 게 아닐까 하고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눈을 뜨기 직전까지 선명하던 기억들이 눈을 뜬 직후 일순간에 사라진 버린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젤리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작은 기대가 끝나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 버린 것 같다.

오후가 되자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어젯밤 간식을 건네던 장소에 찾아갔다.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근처 벤치에 앉아 한동안 지켜보기로 했다. 간간히 보이던 길 고양이 들은 하나같이 나를 경계하며 지나간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똑같은 말들을 했다. "해치지 않아, 나는 그저 어젯밤 보았던 고양이를 찾는 것뿐이야 혹시 이마에 대각선으로 줄이 그어진 고양이를 본 적이 있니?" 나의 말을 듣고 대답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채끝 나기도 전에 자리를 떠나버린다. 귀중한 주말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앉아있었을 뿐인데 세 시간이 지나있다. 나온 김에 근처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걷는 사이에는 내리쬐던 햇살을 구름이 가려버린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아침 일기예보를 통해 들었기 때문에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이내 시선은 다시 앞으로 향해간다. 그런데 공원에 막 도착하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우산을 사려고 해도 몇 분을 걸어가야 한다. 하는 수 없이 큰 나무 아래로 일단 피신을 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같이 우산을 챙기지 않아 당황하며 비를 피하기 바빠 보인다. 그 후로 십 분이 지나자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맑은 하늘이 다시 드러난다. 다행히 큰 나무 아래 있는 덕분에 비 맞은 생쥐꼴을 면하게 됐다. 나무를 벗어나 아무것도 정하지 않은 채 공원을 걷는다. 제법 큰 공원을 끝에서 끝까지 여러 번 반복하면서, 어쩌면 이게 정해진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 않지만 나를 지나쳐가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 사진으로 남겨두지는 않지만 그 순간을 머릿속에 찍어 두는 일.(물론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 며칠이 채 못가 사라지고 만다.) 어릴 적부터 습관이 된 일이다. 요즘은 일이 바빠 쉬는 날이면 집에서 보내기를 좋아하는데 어젯밤 고양이 덕분에 오랜만에 산책을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는 많은 생각들이 담긴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어린 시절의 추억들, 자리 잡은 습관들, 나이가 들수록 제 모습을 잃어가는 일.

그 후로 고양이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며칠간은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더니 그마저도 일주일이 되었을 즘에는 기억 속에서 잊히고 말았다. 고양이를 마주했을 때는 머릿속 어딘가에서 정리될 기억으로 분류돼 삭제 준비 중이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반가움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너 그동안 어디에 있었니? 그렇게 찾아다닐 땐 보이지도 않더니 내 기억 속에서 잊히는 건 싫었나 보구나" 고양이는 내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한 바퀴를 돌더니 이내 내 앞에 주저앉는다. 나 역시 그 모습을 보고는 땅바닥에 앉았다. 몇 분간을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밥은 먹었니? 배고프지 않아?" 고양이는 그제야 작은 울음소리를 낸다.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말았다. "너 처음부터 내 말을 알아듣고 있었으면서 필요할 때만 대답을 하는 거였구나. 여기서 잠깐 기다릴 수 있겠니" 바지에 뭍은 흙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양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통조림을 사 오자 표정이 없던 눈동자가 살아난 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느릿하던 동작은 재빠르게 움직여 간식으로 향한다. "어때 맛은 괜찮아? 이 아파트 단지가 너의 집이니?  먹기 바쁘구나. 그래 먹는 게 중요하지, 우선 먹고 나서 이야기하자" 고개는 여전히 간식에 파묻혀있다. "아, 널 다시 만나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 먹으면서 들어 고개는 들지 않아도 괜찮아.(물론 고개는 처음부터 들지 않았다.) 나도 어릴 적 고양이 친구가 있었는데 너랑 정말 비슷하게 생겼어" 고양이를 바라볼수록 정말 더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은 '젤리'였는데 왜인 줄 알아? 일곱 살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멋지고 소중한 보물이 젤리였거든. 엄마는 이가 썩으면 안 된다고 젤리를 자주 사주시지 않았어. 특별히 심부름을 할 때면 한 번씩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 같은 존재였지. 

그날도 마찬가지로 심부름을 하고 젤리를 사 오는 길이었어. 정말 행복했어, 일곱 살의 순간이 완벽해질 만큼. 그런데 '젤리'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보고 나는 결심을 해야 했어.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줘야 했으니까. 물론 후회는 하지 않았어 내게는 더 소중한 존재가 찾아왔으니까." 먹는 동작을 잠시 동안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맞아. 내게는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이름이 '젤리'가 된 거야. 아쉽지만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지는 못했지 갑자기 집을 나가버렸거든, 참 특이하지 않니?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찾아오더니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다니, " 그사이 고양이는 간식을 다 먹은 것인지 비워져 버린 통을 핥기 시작한다. "그래서 너를 보던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혹시나 '젤리'가 돌아온 게 아닐까 하고, 그런데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아. 아무렴 어때 안 그래?" 혹시나 저번과 같이 볼일이 끝나면 자리를 벗어나는 걸까.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때? 길거리 생활이 마음에 드니? 왠지 모르게 너에겐 정이 가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면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쉽게 하는 말은 아니야." '젤리'를 그렇게 떠나보낸 뒤로 더 이상 가족으로 맞는 일들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할 수 없었다'가 맞는 것 같다. 아무 대답도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더 좋은가 보구나. 이해해 나도 혼자서 잘살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 그럼 너만 괜찮다면 이 시간쯤 매일 나올 테니까. 이곳에서 만나지 않을래?" 고양이는 그 후로 잠시 동안을 서있다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갔다. 단 저번과는 다르게 한 번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나의 말을 알아듣고 이곳에서 다시 보자고 약속을 하는 것처럼.

아마도 누군가 나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미친 사람으로 오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늦은 밤 고양이와 대화를 하는 남자라니,

다음 날 퇴근시간이 기다려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양이와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어디까지나 나의 바람이 담긴 일들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부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요즘 다들 업무에 시달리느라 힘들다는 거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부서원들을 위해 회식을 진행할 예정이니까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참석해."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인가, '업무량이 많다는 것을 안다면 인력 충원을 해주시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결국은 본인이 즐겁자고 벌이는 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저기서 작은 탄식이 쏟아진다. 누군가들은 재빠르게 핸드폰을 들어 약속시간을 미루기 바빠 보인다. "자 그럼 모두들 금요일 파이팅하시고 늦지 않게 업무 마무리할 수 있도록"

회식 때면 찾아가던 고깃집 이모님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지내셨어요?" 대답이 들리기 전에 웃음소리가 먼저 나를 반긴다. "그럼  지냈지오늘 부장님이 많이 즐거워 보이시네." "그러게요짧은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부장님이 많이 즐거워 보인다는 말은 회식이 늦게까지 이어질 거라는 말이다고양이 친구에게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제시간에   있을지 모르겠다자리가 무르익어 가고 부장님의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모습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뜻이다화장실에  사이 옆에 앉아있던 동료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며 조심스레 가방을 챙겨 빠져나왔다. "주말  보내고  찾으면  말해줘알잖아 부장님  정도로 취하면  기억  하시는 고깃집을 빠져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옷에는 이미 고기 냄새가 배어있다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흔들었다조금이라도 냄새가 빠지길 바라면서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바라보니 다행히도 시간을 맞출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서둘러 차를 세워둔 장소로 향해갔다화려한 불빛들 사이로 저마다의 목소리가 뒤섞여 난다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뭐가 그리 화가  건지 골목 한편에서는 고성이 오고 간다답답하게 느껴진다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아파트 근처에 주차를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시동이 꺼지고 감사하다는 사를 전하자 기사님은 바쁜 걸음을 더해 난다. 곧장 편의점에 들러 고양이 통조림을 샀다. "점원은 나를 알아보더니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어제도 사가시더니 오늘도 오셨네요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짧은 대답을 했다그러자 점원은 "저도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요그래서 유독 고양이 간식을  가시는 분들을 보면 기억을 하게 되더라고요잠깐의 대화가 오가고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말은 사실이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과 불빛들이 밤을 깨우고 있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은 마치 다른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만 같은 기분이다. 만약 나에게 두 세계 중에서 하나의 세계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지금의 세계를 선택할 것이다. 캔이 담긴 검은색 봉지가 나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자리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자 고양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늦지 않았는데 아니, 어제 마주친 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한 것 같은데 보이는 것은 가로등의 불빛뿐이다. 하긴, 나의 말을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나 혼자 '젤리'와의 추억에 잠겨 만들어낸 일일뿐이다. 봉지에서 캔을 꺼내 따자 아주 잠깐 고요함을 무너트린다. 이내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나타나 먹길 바라며 한편에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바지를 털고 떠날 준비를 했다. 갈 준비를 했음에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자리에서 벗어나 몇 발자국을 떼자 나의 등 뒤에서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이마에는 선명한 줄무늬를 한 고양이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내가 했던 말들을 마음속으로 주워 담으며 말했다. 확실해. 내 말을 알아듣고 있던 거야.










 

이전 03화 preview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