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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Jun 21. 2021

학방름여

소란스러움이 느껴져 자연스레 눈을 뜨게 된다.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문이 활짝 열리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우야 뭐 하고 있어. 캠핑 가기로 했잖아. 어서 준비해야지"

눈을 비벼본다. 엄마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질끈 눈을 감고 잠시 동안 가만히 있는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눈을 뜬다. 엄마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본다.

"어디 갔었어?"

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말한다. "엄마가 가긴 어딜 가. 항상 내 곁에 있을 거야. 이제 그만. 늦장 부리지 말고 어서 아침 먹고 준비 하자."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문밖으로 나선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을 뜨자 승현이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진우야. 일어났어? 눈이 왜 그렇게 부어있어."

'아, 꿈이었구나. 꿈이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간다. 

승현이는 떠나기 전 인사를 하러 왔다며 말한다.

"진우야 '학방름여'를 잘 보내고 만나자. 시골에 다녀와서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하자."

이모는 내게 자신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내민다. 무슨 일이 생기거나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아도 좋으니 언제든 연락을 하라면서. 두 사람을 떠나보내고 우리도 나갈 준비를 했다.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을 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를 나오자 내리쬐는 햇살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어디선가 매미의 울림소리도 들린다. 

일련의 모습들은 '학방름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 같다.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많은 차량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간다. 익숙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라디오에서는 여름휴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날이 갈수록 더워지는 것 같아요. 수연 씨는 올여름 휴가를 어떻게 보낼 생각이에요?"

"특별할 건 없고요.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과 바다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들었을 말들이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자 왠지 모르게 마음 한 편이 아파오는 것이 느껴진다.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뱉자 할아버지는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조심스레 나의 손을 잡는다. 가만히 손의 온기를 느껴본다. 따뜻함이 느껴진다. 며칠 사이 일어난 일들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자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남긴 순간의 일부로 남겨졌다. 택시에서 내려 터미널 안으로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진우야. 할아버지 집은 여기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어. 긴 시간 가려면 입도 심심할 텐데 뭐 좀 사줄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한편에 나를 남겨두고 재 빠르게 먹을 것들을 사 왔다.

짐칸에 가방을 넣고 버스에 올라탔다.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좁은 통로를 사이를 지나갔다. 손으로 가리킨 곳으로 들어간다. 턱을 괴고 창가를 바라봤다. 정차된 많은 버스들이 어딘가로 떠날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버스는 터미널을 벗어난다. 익숙한 도시의 모습들이 펼쳐졌지만 얼마 가지 않아 새로운 풍경들이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들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엄마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쏟아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내가 바라봐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얕은 미소를 드러냈다. 절반쯤 지나 휴게소에 도착했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화장실을 다녀와 버스로 곧장 향해가려고 했으나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는 엄마의 품에 안겨 먹을 것을 고르고 있다. 이윽고 계산된 무언가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나눠먹는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행복함을 제외한 그 어떤 감정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동안 멈춰져 있던 다리를 움직이려고 했을 때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진우야. 우리도 뭐 좀 사 먹을까. 할아버지도 허기 가져서.."

할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버스에 올라타기 전 사두었던 간식거리들을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여나 내가 먹을까 기다리기만 했다는 것도,,

내가 바라보던 이유는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면 할아버지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먹고 싶어서 바라본 게 아니었다는 것을,

"좋아요. 우리도 먹어요"

소시지에 케첩을 바르고 한입 베어 물자 자연스레 미소를 짓게 된다.  할아버지에게도 건네자 아주 조금 먹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진우 다 먹어"

잠깐의 휴식을 끝 마치고 버스에 올라탔다. 깊게 잠들어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갔다. 

바닥에 놓인 검정 봉지를 뒤적거리자 가장 먼저 젤리가 손에 잡힌다. 슬쩍 꺼내 봉지를 뜯는다. 그리고선 재빠르게 하나를 입안에 넣어본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할아버지. 젤리 드세요." 다른 생각을 했던 것인지 갑작스레 건넨 나의 말에 놀라는 것도 잠시 손바닥에 놓인 젤리를 집어 든다.

"고마워. 진우도 많이 먹어"

기사님은 인원수가 맞는지 파악을 하고 문제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곧장 시동을 켠다. 

출발을 알리는 엔진 소리가 시끄러울법한데도 서서히 눈이 감겨간다. 

"진우야 도착했어."

몇몇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가장 마지막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처음 마주한 곳에서의 낯섦과 아직은 가시지 못한 피곤함이 뒤섞여 나타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사십여분 정도를 더 가야 한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먼발치를 바라보는 사이 할아버지는 누군가와 인사를 했다. 

"아이고. 오랜만이야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보네. 옆에는 누구야?"

할아버지는 " 응 그럴 일이 있어서 누구긴, 내 손자야. 손자"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분은 화들짝 놀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넨다. 만 원짜리 한 장이었다. 잠시 동안 주저하는 사이 "어서 받아. 어서"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

"그럼 딸도 같이 온 거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대화는 도착한 버스로 인해 끝이 났다. 이야기를 나누던 분은 그럼 다음에 보자며 재빠르게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는 그 후로 이십 분의 시간이 더 흐르고서야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게 되었다. 잘 정돈된 도로를 벗어나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 접어든다. 어느새 건물은 사라지고 논과 밭이 나의 눈앞에 펼쳐진다. 영상 속에서만 보던 모습들이다. 신기함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이쪽저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어갔다. 우리가 내릴땐 아무도 남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아주 큰 나무 하나가 동네 입구를 지키고 있고 아래 놓인 평상 위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등장하자 모두들 반가움을 내비치고 처음 보는 나의 모습에 신기함을 드러냈다.

모두들 똑같이 말했다. "이 아이는 누구야?"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처음과 같은 말로써 대답을 한다. "누구긴 누구야. 내 손자야. 손자"

그럼 신기하게도 똑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잘 됐네. 그럼 딸도 같이 온 거야?"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앉아있던 분들에게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골목의 끝에 할아버지의 집이 있다.

멋진 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잘 가꾸어진 텃밭과 정돈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진우야 네가 사는 아파트랑은 다르게, 할아버지 집은 안 좋지? 오래된 집이라서 그래."

괜찮다는 듯 손짓을 더하며 "아니에요. 좋아요."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옆집에서 나온 할머니는 우리를 반긴다. 할아버지와는 꽤나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다. 그런 할머니는 다른 분들과는 다르게 "내가 진우구나. 반가워, 잘 왔다 잘 왔어."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멋쩍은 듯 인사를 하자 껴안음으로써 반가움을 드러낸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할아버지는 짐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따라 들어가자 할머니 역시 우리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여기가 네 엄마 방이야."

잘 정돈된 방안은 마치 어제까지 누군가 지냈던 것처럼 보였다. 벽면 한편에는 엄마가 받은 상장들이 붙어 있다. 책상에는 젊을 적 엄마와 할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해가 저물자 할아버지는 마당 한편에 놓여있는 평상 위에서 저녁을 준비했다. 밥이 다되었을 즘에는 옆집에 살던 할머니 그리고 몇몇 분들이 더 모이게 되었다. 모두가 나를 반겨주는 모습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진우야 많이 먹어"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버너 위에 올려진 불판에서는 쉴 새 없이 고기가 구워졌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자리는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옆집 할머니가 수박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시원하고 달콤했다. 며칠 동안 지속된 긴장감이 사라지자 피곤함이 밀려왔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 나의 시선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엄마의 흔적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떠 벽면의 시계를 바라보자 두 시간이 지나있었다.

여전히 바깥에서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슬며시 문을 열자 다른 분들은 모두 떠난 뒤였고 할아버지와 옆집 할머니의 모습만이 보일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집중을 했다.

"어쩔 셈이야. 다 늙어서 다시 아이를 키우려고? 몸도 성치 못하면서."

"별소리를. 진우 다 듣겠어."

"아니 그렇잖아.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제자식도 아닌 애를 평생 동안 키웠더니 스무 살이 되자마자 결혼하겠다고 남자애를 대려 오고 말이야. 너무 어리다고 다시 생각을 해보라고, 타이르고 화도 내 보고 얼마나 우리가 노력을 했어. 그랬더니 쪽지   남겨놓고 사라졌잖아. 임신을 했다고 아버지가 반대하면 평생 동안  보고 살아도 된다고  지내시라고. 그때 우리가 속상함에 얼마나 울었는지 ,,"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보였다. "다 지난 이야기를 해서 뭐해. 장례를 끝마치니까.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허락할 것을, 뭐가 그리 걱정돼서 반대를 했을까. 자네도 알겠지만 딸과의 마지막이 그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아무 말하지 않고 그냥 한번 더 안아줄 것을, 손 한번 잡아줄 것을, 그게 아직도 너무 후회가 돼."

"그러게 말이야. 공부도 잘하고 속한 번 썩이지 않던 애가 그렇게 집을 나가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이제야 조금은 어긋나 버린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장례식장에서 이모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들었던 밤이 떠올랐다.

"진우 엄마도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괜히 마음과는 다르게 더 어긋나게 행동을 했다면서. 가장 후회가 됐대요. 집을 나오던 날. 아빠가 울던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모른 척했다면서. 세상이 참 불공평한 것 같아요. 죽기 얼마 전 그러더라고요. 진우가 더 크기 전에 할아버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이번 여름방학에는 용기 내 찾아볼 생각이라고."

이모의 말처럼 엄마와 내가 직접 할아버지를 찾아왔더라면 내가 마주했을 첫 모습은 슬픔에 잠긴 표정이 아닌 기쁨으로 가득 찬 표정이지 않았을까.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말끝을 흐리는 것이 아닌, 할아버지 엄마 나. 그렇게 우리 셋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지 않았을까.

내 딸이 집에 왔다고. 이렇게 잘 살아서 손자와 함께 나를 보러 왔다고.

엄마의 흔적이 남아있는 방 안을 둘러본다.

벽면을 바라보고 천장을 바라보고 구석구석 시선을 옮긴다.

만약 그랬더라면,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하나씩 설명을 해주었을 것이다.

이건 어릴 적 모습이고, 쓰던 일기장이며 좋아하던 옷이었다고.

순식간에 긴 시간이 뛰어넘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방안 곳곳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언젠가 돌아올 엄마를 생각하며 매일 방을 청소하고 맞이할 준비를 했을지도 모른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엄마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오고 만다. 금세 베개는 눈물이 젖어 축축해진다.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킬까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낸다.


"그래서 진우는 정말 어쩔 셈이야." 옆집 할머니는 답답한 듯 말을 이어나간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러자 할머니는 "진우도 알고 있는 거야? 지금 몸 상태가 아주 안 좋다는 것 말이야." 몸상태가 안 좋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생각의 틈으로 빠지려던 찰나 "당연히 모르지. 앞으로도 모르게 할 거야. 진우에게 또다시 이별의 아픔을 줄 순 없어. 진우를 보살필 거야."

할머니는 코웃음을 친다. "그런 양반이 치료를 거부해?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조금이라도 더 늦게 발견되었으면 정말 손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른다고. 늦은 건 사실이지만 이제라도 치료를 시작하자고 말했을 때 더 살아서 뭐하겠냐고 거부했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은 채로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집을 떠나간 뒤로 매일을 기다렸어. 혹여나 대문이 잠겨 들어오지 못할까. 대문도 잠그지 못한 채로 살아왔어. 불이 꺼진 방안을 보고 들어오기를 망설일까. 늘 한쪽 방의 불을 켜 두었지. 일 년 전 딸의 친구라는 분에게 연락을 받고서 얼마나 울었던지,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딸을 닮은 아들과 함께 말이야. 혹여나 잘못되지는 않았을까.라는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 큰 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이 상태로 언젠가 딸을 마주한다면 분명히 피해를 줄 게 뻔하다고 생각했어. 그러니 조용히 지내다 떠나가는 것. 그게 딸아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어."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두 분의 대화에 온몸이 굳어진다. 잠에서 깨지 말았어야 했다. 그대로 아침까지 잠들었더라면 할아버지가 내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큰 병에 걸려 어느 순간 나의 곁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함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눈이 떠져버린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불속으로 깊숙이 얼굴을 파묻는다. 아무 소리도 듣지 않기 위해 양손으로 귀를 막고 숫자를 센다. 

하나. 둘. 계속해서,, 부디,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들기를 바라면서.


문이 열리는 인기척 소리에 이불 밖으로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자 "진우야 잘 잤니" 할아버지는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방안은 이미 햇빛이 가득 들어와 비추고 있었다. 불현듯 어젯밤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들었던 이야기들을 입 밖으로 꺼내려다 용기가 나지 않아 멈추게 된다. 무서웠다. 정말 입 밖으로 뱉어 버리는 순간, 모든 것이 사실이 되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또다시 홀로 남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네 잘 잤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어디 가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한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있다.

"응, 할아버지 밭에 좀 다녀오려고 해. 금방 갖다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부엌에 가면 밥 차려 놨으니까. 꼭 먹어야 해" 짧을 대답을 하자 "그래, 이따 보자."

부엌 한편에는 신문지가 올려진 작은 상이 보인다신문지를 들어 올리자 계란말이김치콩나물국장조림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밥통을 열자 밥이 담겨있는 작은 그릇을 마주한다. 밥그릇을 꺼내 상위에 놓는다. 분명히 아무 소리도  들렸던  같은데언제 이렇게 준비를 한 걸까, 밥을 먹으며 시선을 움직인다. 할아버지 집은 오래된 집의 구조이지만부엌만큼은 새롭게 지은 것인지 조금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무심코 계란말이를 집어먹는 순간엄마가 해주던 맛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엄마는 할아버지에게 요리를 배웠었나 보다콩나물국을 먹으면서도장조림을 먹으면서도놓인 반찬을 먹을 때마다 느껴졌다.


언제쯤 엄마와 식탁 위에 앉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엄마는 누구에게 요리를 배워서 이렇게 잘하는 거야? 나는 엄마가 해준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엄마는 처음부터 잘했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러자 "여기 있지. 앞으로도 엄마가 맛있는 음식 많이 해줄게.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지금처럼 건강히, 행복하게 지내자"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있지. 만약에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나는 영원히 엄마가 해주는 음식들을 먹지 못하게 되면 참 슬플 것 같아" 울상을 짓는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가까이 다가와 꽉 안아주며 말한다. "아들, 그런 생각하지 마. 절대로 엄마는 네 곁에서 사라지지 않을 거야. 언제까지라도 곁에 남아 우리 아들이 멋진 어른이 되는 모습을 지켜볼 거야" 

"맞아. 승현이가 그러는데 나쁜 생각을 하면 정말 나쁜 일이 생기는 거라고 했어. 방금 한말 취소야. 나쁜 말 취소."


취소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보. 왜 그런 말을 해가지고, '

집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에 있어요~?" 수저를 내려놓고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넌 누구야?" 나를 바라보며 누구냐고 묻는 여자아이에게 나 역시 마찬가지로 " 난 진우야. 그럼 넌 누구야?" 여자 아이는 웃음을 띤다. "네가 진우구나. 나는 수현이야. 우리 할머니는 어제 만났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옆집에 사는 할머니 말이야. 우리 할머니야. 나는 어제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늘 왔어. 우리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뭐 좀 갖다 주라고 해서, 할아버지는 어디 갔어?"

"일하러 간다고 했어."

"그래? 어쩔 수 없지. 자 이것 받아. 옥수수야"

아직도 김이 나고 있다. "이제 나를 수현이라고 불러. 나도 너랑 같은 열 살이야. 넌 어디에서 왔어?"

"서울에서 왔어." 그러자 수현이의 눈은 휘둥그레 커진다.

"우와. 서울? 거긴 정말 큰 도시라던데 나는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이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자 "왜 아무 말도 없어? 그런데 넌 오늘 계획이 뭐야?" 계획 같은 게 존재할리 없다.

"나도 잘 모르겠어. 우선은 지금 밥을 먹고 있거든." 수현이는 큰소리로 웃는다.

"이제야 밥을 먹는 거야? 너 정말 게으르구나. 아침, 점심, 저녁, 은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하는 거야~ 그럼 밥 먹고 나랑 같이 놀러 가지 않을래? 내가 동네 구경시켜줄게."

싫지 않은 기분이지만 그렇다고 단번에 수락 또한 하고 싶지 않았다.

"너는 원래 질문에 답을 잘 안 하니? 싫은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됐어. 삼십 분? 한 시간? 얼마나 기다리면 다 먹고 준비할 수 있겠어?"

"삼십 분?"

"그래 좋아. 삼십 분 뒤에 다시 올게. 안녕"

밝은 친구인 것 같다. 미소가 가득하고, 막힘이 없는 그런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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