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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GOING HOME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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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Dec 16. 2022

온 세상이 진심으로 나를 위로하다.

비우기 시리즈 9. 

퇴사를 하고, 한 몇 주간은 재택근무를 하는 척했습니다.



왜냐하면, 엄마에게는 아직 퇴사 사실을 알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가족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아빠에게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여럿을 적부터 저에겐 민감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엄마보다는 아빠가 조금 더 편했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저만큼이나 크게 아파하는 게 눈으로 확연히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지 못한 소식을 꺼낼 때마다, 속상해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마음에 쓰여, 이번에도 차마 먼저 말을 먼저 꺼내지 못했는데요.


반면 아빠는 속으론 마음이 아파도, 겉으론 티를 거의 내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반응의 차이였던 거지, 두 분 다 누구보다 제 일에 대해 저만큼이나 가슴 아파하고, 또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는 분들인데요.


다만, 저에게 나름 큰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배려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아빠의 태도가, 왠지 모르게 더 편했습니다. 그래서 아빠 앞에서 더 솔직한 제 진심을 먼저 꺼낼 수 있었어요.


아빠에게  퇴사 기간이 불과 2일밖에 안 결렸다고 말하자. 아빠는 오히려 잘됬다며, 내가 오래 있어봤자 불편했을 텐데, 빠르게 나온 게 다행인 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해주셨죠.

덕분에 마음이 꽤나 가벼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계속 재택근무를 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엄마가 무슨 일이 있냐고 먼저 물어봐 주셨을 때 그제야 약간의 과장을 섞어 퇴사 사실을 밝혔는데요.


역시나 처음엔 제 상황에 누구보다 분노하고, 아파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내 시간이 조금 흐르자, 저를 배려해서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셨지요.



두 분의 다정한 배려 덕분에 저는 퇴사를 한 11월부터 12월까지 오롯이 저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저에겐 늦가을에서 겨울로 지나던 11월에서 2월은 항상 몸과 마음이 위축되고 외로운 시기였습니다.

20대 때는 항상 신년에 세웠던 목표보다, 뭔가 더 많이 성취하지 못해 아쉬워했었고, 일이 마음만큼 풀리지 않을 때는 그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자책을 했었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2021년의 늦가을부터 그해 겨울은 31년을 살아가면서 가장 따뜻하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부터 시작해서 2022년 거의 2월까지는 평소 회사에 다니느라 하지 못했던, 등산과 자전거 타기를 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꼈는데요.


특히 등산을 하면 보게 되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금빛으로 물들어, 걸을 때마다 제 마음도 함께 금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데, 아무런 걱정도 없었습니다.


그냥 뭔가 마음이 평온하고, 풍요로웠고, 이 시기에 제가 마주하고 있는 햇빛과 자연 풍경이 너무나 귀했습니다.


그리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틈만 나면 명상을 했습니다.


비록 혼자서는 명상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가이드를 틀어놓고 해야 했지만, 방석 하나를 방안 가장 귀퉁이에 깔아 두고, 꾸준히 저 자신 안에 있는 고요함에 집중했습니다.


처음엔 어색해하면서 5분도 집중하지 못하던 명상 시간이, 점차 10분 이상으로 늘었고 나중엔 길게는 한 번에 1시간 이상씩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명상 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아주 오래된 부정적인 생각들, 예를 들면, 과거의 있었던 특정 사건에 대한 분노나, 타인을 비난하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두었는데요.


그리곤 명상이 끝나고 나면, 이를 글로 적어보고, 내가 이 생각을 왜 하게 되었지? 라며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이 시기엔 특별히 생산적이라고 불일만한 일은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려고 시도를 해도 이상하게 잘 안되었고요.



다만, 꾸준히 저 자신에 대해 기록하고 회고하는 일은 신기할 정도로 몰입도가 높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등산을 하고, 집에 돌아와 평소 좋아하던 웹툰을 처음부터 다시 정주행 하게 되었습니다. 이 웹툰은 돌배 작가님의 계룡 선녀전이라는 작품인데요.



이 웹툰 스토리의 주요 배경은 주인공들 간의  끊임없는 환생과 끈질긴 인연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 그날 유독 저에게 가장 가슴에 와닿는 서사가 있었는데요. (스포가 될까 봐 많은 부분을 생략한 상태에서 제가 인상 깊었던 장면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웹툰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세상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많은 까칠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실제 스토리 상에서도 주요 갈등의 중심에 있는 인물인데요.


이야기의 주요 서사에서 그로 인해 주변 인물들이 크게 다칠만한 큰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그의 세상에 대한 불같은 분노 때문이었는데요.


이런 갈등 상황에서 갑자기 어떤 신성한 존재가 나타나 상황을 중재하는데요.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를 가지게 된 원인인 그의 전생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는 전생에 기근과 굶주림이 심하던 시기에, 마을 사람들과 부모로부터 가장 먼저 버려진 연약한 아이였습니다.


그 연약한 아이는 마을 사람들의 냉소적인 태도와 무관심 속에  배고픔과 추위에 떨다 결국 죽게 됩니다.


이 분노를 가지고 죽은 아이는 그다음 생에도 또 그다음 생에도 마을 사람들 끝까지 쫓아 가 복수를 하는데요.


다만 세상에 대한 이 복수심과 분노는 영겁의 시간을 거쳐도 전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생에서 더 커졌죠.


자신의 전생을 보게 된 그는, 그 신성한 존재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현재 분노와 화, 질투로 가득한 건, 이미 여러 번 세상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아무도 내가 슬프고 힘들 때 도와주지 않았다고! 그러니 나는 화를 내도 마땅하다고 말이지요.



모든 것을 다 삼킬 듯한 분노를 내뿜는 그에게 신성한 존재는 그가 미쳐 보지 못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외면받아 굶어 죽어가던 자신에게 누군가 황급히 뛰어오고 있는 모습을요.


그 뛰어오는 사람은 마을에서 추녀로 손가락질받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도 없이 추운 곳에서 배를 곪고 있을 가련한 어린아이가 떠올라, 죽을 한 그릇 손에 들고 열심히 아이가 있는 곳으로 뛰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을 한 그릇 먹이지도 못하고, 결국 아이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 모습을 전생의 그는 미쳐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던 존재가 있던 것을요.


신성한 존재는 그가 이렇게 세상에 대한 분노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원인은, 이 여인이 그에게 죽을 가져다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그날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되감기를 하며 그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 되감기를 해도, 그녀는 결코 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죽을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결국 그녀마저 숨에 차 고꾸라져, 죽고 마는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신성한 존재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보기 괴롭다며 멈춰달라 부탁합니다.

그러자 신성한 존재는 다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던 여인은 그다음 생에서 그를 또 도와줬으며, 현생에서도 항상 옆에서 그를 다정하게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성한 존재는 이야기합니다.



온 우주가 진심으로 너의 그 아픔을 위로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고요.



저는 이 장면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종종 저는 삶이 정말 지겹도록 괴롭고 외로울 때마다 이상하게도 주변의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는 걸 자주 목격했습니다.


정말 이상했습니다. 내 마음은 지옥인데, 내 눈에 비치는 풍경은 말도 안 되게 아름답다는 게 너무나 모순적이라고 생각했었고, 때론 꼴이 뵈기 싫어 눈을 감기도 했었죠.


그런데 이 웹툰을 보면서, 어렴풋이 왜 그랬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내가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마다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 어려운 순간 속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


항상 내 주변에 나를 다정하게 챙기는 내 이웃과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위로하고 있었구나.


세상이 나를 괴롭힌다고,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던 건 굉장히 큰 착각이었구나.


그날 저는 거실 소파에 앉아 웹툰을 보다 하염없이 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곤 오랜 시간 저 자신을 외롭게 만들던 세계에서 걸어 나와,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위로해주고 있던 삶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의 기도를 보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저의 번아웃 극복기 중 가장 첫 번째 시리즈였던, "비우기 시리즈"가 슬슬 마무리되어 가네요. 


비우기 시리즈에서는 굉장히 오랜 시간 제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던 두려움들을 마주하는 과정들을 담았는데요. 


다음 이야기인 "채우기 시리즈"에서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저 자신을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제 자신과의 신뢰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아볼 예정입니다. 


오늘도 제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다음 이 시간에 찾아뵐게요! 


오늘도 무탈하고 평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김고래 드림. 




이야기에서 언급된 돌배 작가님의 계룡선녀전도 꼭 한번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워낙 인기 있는 작업이라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습니다. 


https://comic.naver.com/webtoon/list?titleId=693431





이 이야기는 매주 토요일에 개인 이메일로도 발행해 드리고 있습니다. 혹시 이메일로 받아보길 희망하시면 아래 링크로 접속해 주세요!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08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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