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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riaMJ Mar 29. 2022

야만을 문명이라고 착각하지말길

목소리들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어떤 이들의 목소리는 아주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가령,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클린룸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이나 학교 급식실에서 조리를 하는 노동자들이나 농촌의 만성적인 인력 부족을 살인적인 조건 속에서 채워주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목소리 말이다. 

  그런 노동자들의 문제가 계급과 자본의 문제라면 다른 층위의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 또한 존재한다. 젠더의 층위에선 여성의 목소리가, 세대의 층위에선 어린이와 청소년-청년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듣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이들로부터 너무너도 쉽게 배제된다. 

누가, 이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아할까. 이준석 같은 인간.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 어떤 대단한 사명이라도 부여받은냥, 대단한 정치인이라도 되는냥 굴지만 실은 그냥 관종에 불과한 어린애. 어쩌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단 한 줄의 진심과 열의로는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는 미숙한 사람. 그런데 그 미성숙한 인격이 권력과 계급의 갑옷을 두르자 혐오를 특권처럼 여기게 된 걸까. 아니면 원래 혐오를 자양분삼아 몸집을 불려온 제 자신의 역사를 이제는 심지어 자랑스럽게 여기게까지 된걸까.      


이 대표의 발언 중 ‘비문명적 시위’라는 말. 

무엇이 문명이라고 반문하고 싶다. 

나와 다른 처지의 사람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 고통을 위해 적극적으로 돕거나 연대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왜 그렇게 고통 받는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문명의 조건은 이런 건데, 이준석 식 문명은 타인의 고통을 묵살하고 조롱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희화화하는 것일까. 야만을 문명으로 오독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혐오장사를 통해 재미본 경험을 기반삼아 시즌2로 나아가고 싶은건가. 

정말 이런 어린애한테 관심을 갖고 싶지 않은데.      


출근길에 조금 늦는 것과 

일상적인 이동의 과정에서 매번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는 것이

저울질이 가능할까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주장하는 이동권에 대한 요구가 대단한 특혜를 요구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이 도시의 모든 요소들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돼 우리가 바로 그 배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동조하며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도 사유해본적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시위에 적극 참여는 못하더라도 이준석 류의 망언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한다.      


김예지 의원이 무릎 꿇고 사과한 것과 나경원 전 의원이 이준석을 저격한 건 

그들이 전장연의 이 시위에서 당사자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책임을 느낀 것이다.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닌가, 시민들의 아픔과 고통에서 자신을 유리시키지 말고 

그 문제가 무엇이든 경청하여 당사자성에 한 걸음이라도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      

당사자성이나 공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것이다. 
 미성숙한 관종은 그걸 알지나 모르겠지만           


어쩌면 국민의 힘이나 이준석은 자신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사회 의제와  이 세상의 진보의 일선에 서는 것이 말이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민하며 행동을 하기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잡음들이 그저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을 나누고,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뺏고 하는 꼼수만 고민하며 

몇 번의 선거만 넘기면 될 거라도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북풍이라도 불어달라고 도사나 찾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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