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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리Rhee Nov 07. 2023

우리 반 여자 반장아이가 입은 조끼

브랜드옷만 사주는 외할머니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엄마는 나와 남동생에게 입힐 옷가지 쇼핑은 최대한 알뜰하게 남대문,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해 오시곤 했다. 엄마를 따라 남대문 동대문 옷을 쇼핑을 하러 가면, 발 디딜 곳 없는 좁다란 골목골목을 돌아 커다란 매대에서 "3000천 원!" 목청껏 외치는 상인 앞에 서서 한참을 구경하곤 했다. 상 하의 구분 없이 무조건 개당 3천 원짜리는 사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가져와서 입어보면, 옷 앞에 프린트되어 있는 정체 모를 그림들은 촌스럽기 짝이 없고, 얼룩덜룩 염색은 제멋대로여서 옷이 뻣뻣했다. 그렇다고 외할머니가 사준 옷을 즐겨 입기에는 너무 정장스럽고, 부담스러웠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2차 성징이 나타나고 이성에 눈을 뜰 무렵이었다. 나는 좀 통통한 편이었는데, 옷을 맵시 있게 입고 싶었다. 내가 집에 와서 엄마 앞에서 폴짝 거리며, "엄마 우리 반에 남자 반장 *** 걔 있잖아. 막 수업시간에 떠들어, 그리고 장난도 너무 심해." 이렇게 이야길 하니, 엄마는 대뜸 나를 놀리며 "너, ***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 이튿날부터, 우리 반 남자 반장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유독, 눈을 자주 주는 여학우가 있었는데, 우리 반 여자 반장아이 었다. 여자 반장 아이는 눈썹이 짙었고, 짙은 눈썹만큼이나 짙은 머리색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고 그 아래로 떨어지는 머리는 쫑쫑 땋아 내렸다.  눈꼬리는 항상 초승달처럼 빙그레 웃으며 아래로 살짝 내려가 있었는데, 같은 동급 여학우인 나에게도 꽤나 명랑하고 생동감 있는 여학생으로 비쳤다. 하루는 그 여자 아이가 하늘색 푸른 긴팔 티셔츠에 위에 베이지 빛깔의 조끼를 걸치고 왔는데 그 옷차림이 나의 시선을 강탈하였다. 나도 우리 반 남자 반장아이가 항상 눈길을 주는 그 여학우의 조끼를 걸치기만 하면, 생동감이 있고 인기 있는 그런 학생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부터 나는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설거지하는 엄마 옆으로 가서, "엄마 나도 베이지 빛깔의 조끼를 사주세요. 그런데 그 조끼는 단추가 있어야 하고 그 단추를 열고 잠그고 할 수 있어야 해요." 1절만 하면 될 것을 나는 2절도 했다. "엄마 조끼를 사주세요. 입으면 날씬해 보인단 말이에요. 베이지 빛깔이면 좋겠어요." 방바닥을 물걸레질하는 엄마 궁둥이 뒤를 졸졸졸 쫓아다니며, 조끼를 졸라댔다. 역시 지성이면 감천이다. 그렇게 알뜰한 엄마가 나를 위해 조끼를 사 오셨다. 엄마는 또 조끼를 사러 멀리 남대문을 다녀오신 것 같다. 엄마 손에 들린 검정 비닐봉지 안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꽈배기 튀김 과자, 그리고 아마 녹차를 우려 드시고 싶으셨는지, 녹차 다기 (신문지 안에 돌돌 말려있었는데, 신이 나서 또로로로 굴리며 쌓여있는 신문지를 펴다가 그만 그 안에 다기를 깨뜨려먹고 말았다! 엄마에게 학습지 검사가 바로 뒤따랐다는 사실은 안 비밀!), 그리고 맨 마지막 봉투는 내 조끼! 였다. 들뜬 마음에 조끼를 꺼내 들었다. 와~ 내가 원하던 베이지 컬러였다. 듣는 둥 마는 둥 해 보이던 엄마는 베이지 컬러는 명확히 기억하셨다. 양쪽에 팔을 껴 넣고 입어 보았다! 그런데 등판이 빨강 초록 체크무늬였다. 뭔가 촌스러운 것 같았다. 실망스러웠다. 엄마 나름의 기준에 맞추어 포인트가 있는 조끼를 사 오신 것 같은데, 내 마음에는 안 들었다. 앞판이 아무리 베이지 컬러의 조끼라고 해도, 등판의 빨강 초록 체크무늬로는, 내가 우리 반 여자 반장 아이를 닮기엔 너무나 큰 장벽이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안에 받쳐 입을, 여자 반장 아이가 입는 하늘색 긴팔 티셔츠가 없다는 거였다. 엄마가 남대문에서 공수해다 준 뻣뻣한 무늬의 티셔츠를 받쳐야 하는데, 등판 빨강 초록은 도저히 색상이 녹아들질 않았다.


엄마를 얼마나 졸라서 얻은 조끼인데, 그래도 한 번은 입어야지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뻣뻣한 프린트의 기본 티셔츠에 억지로 팔을 조끼에 구겨 넣고는 등교를 했다. 계절은 봄에서 초 여름을 넘어가는 시기였고, 오후에는 햇살이 꽤나 따가웠다. 따가운 햇살만큼이나, 그날도 우리 반 여자 반장 아이는 여자 아이들에게 둘러 쌓여 짙은 눈썹을 아래위로 움직이며 환하게 깔깔깔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입고 있는 조끼는 퍽이나 어색했고, 계절 탓인지 덥기까지 했다. 살그머니 조끼를 벗어서 가방에 넣어버렸다. 조끼를 입었건 벗었건 나는 환한 미소를 가지고 있는 여자 반장 아이는 될 수 없었다. 그날도 내가 관심 있는 남자 반장 아이는 여전히 우리 반 여자 반장 아이에게 관심을 두고 숙제인지 뭔지 모를 것을 물어보는 척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이후 내 가방 안에 들어간 베이지 색 조끼는 영원히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하고 옷장 속에서 잠들었다. 내 등살에 남대문까지 가서, 내가 주문한 조끼를 사다 준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리고 이제 보니 베이지 컬러 만으로 멋을 내기는 쉽지 않다. 빨강 초록 정도의 포인트가 있어야 조끼로써의 한몫은 하는 것 같다. 역시 엄마의 안목은 존중받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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