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집으로 와 27화

수고

by 준혜이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온몸을 움츠리게 하고, 어두침침한 주위를 밝히려 전등 스위치를 올리면서 시계를 보면 아니 벌써, 가을. 우리는 이곳에서 어느새 한 계절을 보내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비를 방해하며 흔들리는 나무 소리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아 휘청이는 나무 소리를 달리 들으며 두 계절을 새로 배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여러 겹의 시간과 그 위로 띄엄띄엄 돋아나는 갑작스러운 순간을 모아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이 든 우리를 서로에게 보여주자, 아니 뭐야 벌써, 중년?


우리가 이 집에 이사 들어온 날은 습도가 유난히 높던 여름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빈 집을 떠도는 유령 같은 지하실 냄새가 우리를 맞이했다. 분명히 우리가 집을 보러 왔을 때는 이러지 않았어 역시 우린 사기를 당한 거라고 밤잠을 설쳤는데 아침 일찍 시아버지께서 습도계와 제습기를 지하실에 들여놓고 이거 봐라, 하셨다. 제습기를 돌린 지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지하실 냄새는 사라졌다. 그러면 내가 안심할 줄 알았지 곰팡이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곰팡이 제거 회사에 전화를 걸 줄은 몰랐다. 인스펙터가 집에 곰팡이는 없다고 했지만 난 이제 그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어. 잠깐 동안 이 집의 전주인 할아버지의 노화된 후각이 걱정되었다.


언니들 집에 초대받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커피를 끝도 없이 마시던 날들이 떠올랐다. 언니들이 말없이 감당하고 있었을 하루하루의 수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부지런히 집을 돌보고, 가꾸고 집 어딘가에서 문제를 발견하면 미루지 않고 해결책을 찾아 적극적으로 수습하는 언니들의 지하실에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제습기가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집만 있으면 나도 언니들처럼 살 줄 알았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도 몰라 어느 누구에게도 뭘 제대로 물어볼 수도 없는 나의 무지를 깨닫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집에 왕진 온 의사처럼 몸소 방문하신 분들은 창문 업자, 곰팡이 전문가, 벌목업자, 환기구 청소업자, 해충 방제 업자, 핸디맨 되시겠다. 이분들 이름 옆에 숫자를 나열해볼 수도 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겠어요. 그건 마치 그칠 줄 모르는 출혈과도 같았다고만 해두죠. 매튜 매커너히의 독백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 창문 업자 탈락, 새로 이사 들어오셨나 봐요, 하면서 서글서글하게 굴더니 돌연 우리한테 바가지를 씌우려 드는 것 같아 곰팡이 전문가도 탈락. 하루가 멀다 하고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는 일에 지쳐 우리는 굴뚝 청소와 빗물받이 청소는 나중으로 미루었다. 그나마 미룰 수 있는 일이 뭐라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우리가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동안 우리 곁에는 시부모님이 계셨다. 그래서 시부모님이 캐나다로 가시기 전날 밤 나는 시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살죠? 하나씩 천천히 하면 돼. 저는 이제 어떻게 살죠? 아우, 그냥 살아. 내가 다음에 와서 해줄게. 네, 낄낄낄. 한국에서 소파를 사서 배로 부쳐주겠다는 엄마의 카톡에 워워. 그러니까 올여름은 이 집을 우리 가족만의 보금자리,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요새로 여기며 문 꼭 닫고 살아가려던 마음이 점점 사그라드는 계절이었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는 우리의 생활이 언제까지나 편안하고 안전할 리 없고, 시부모님 밑에서 남편이 생각보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다는 걸, 설마설마했지만, 알게 되었으니까.




keyword
준혜이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354
이전 26화다정한 이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