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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Nov 07. 2021

캐러멜 나무

   누운 몸을 뒤척이며 스마트폰 알람을 끄고 귀마개를 빼고 수면안대를 풀면서 블라인드가 끝까지 내려가지 않은 창가에 눈길을 준다. 키 큰 나뭇가지 뒤로 보라색 주황색 붉은색이 엉킨 하늘이 보인다. 순간 우리 뒷집에 불이 난 줄 알고 심장이 빠르고 세게 뛴다. 바로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블라인드를 다 올렸다. 오늘 아침해가 어제 아침과 다른 세상을 만나 뒤섞인 빛깔이 내게는 이토록 위협적이었다. 창가에서 뒤돌아 아직 누워 자는 아이들과 남편을 내려다본다. 불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치면 누가 제일 늦게 일어날까. 누가 내 말을 믿고, 믿지 않을까. 잠에서 깨어난 지 5분도 되지 않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깨어나 살아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고 개운하지 않은 아침이다.

   발코니 문 앞에 서서 붉은빛이 모두 사라져 이제는 누구도 놀라게 하지 않는 관심 밖의 하늘로 밝아오는 하루를 본다. 바라보면 가을, 닿으면 겨울일 이 계절이 예전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건 아니라고 느낀다. 10월이 다 가기 전 하루가 멀다 하고 시린 비가 내렸고, 그 비가 그치자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부지런히 잎을 떨궜다. 풀벌레와 개구리가 침묵을 선택한 자리에서는  이름 모를 새가 더 자주 크게 울고, 나뭇잎은 동전 소리를 내며 떨고, 솔방울이 나무 밑에 툭툭 쌓였다. 단 한순간도 가만히 멈춰 선 적 없는 바깥 풍경을 외면하고 매번 갑작스럽게 맞이하던 새로운 계절 속에서 내가 움직인 거리가 나 스스로를 위협하고 놀라게 했지.

    

   현관문을 열고 나가 산책을 했다. 햇빛에 바짝 마른 솔방울을 골라 밟으며 동네의 고요를 뒤흔든다. 어느 집 앞을 걸어지나 가는데 단내가 났다. 사과나 포도가 조용히 썩어가는  같기도 한 그 냄새가 어디에서 나는지 알고 싶어서 나는 그 집 앞을 서성이며 떠날 줄 몰랐다. 외투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나무로 검색했더니 계수나무잎이 가을에 단풍이 들면 달콤한 향을 내뿜는다고 한다. 그래서 Caramel Tree라 불리기도 한다고 구글이 그런다. 나는 계수나무잎 하나를 주워 냄새를 맡아보았다. 솜사탕, 달고나, 캐러멜. 더 이상 과일 썩는 냄새라고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에 계수나무 한 그루를 심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빠졌다. 봄이 되어 나무 파는 가게에 가서 캐러멜 나무 하나 주세요. 내 키 만한 나무를 차 트렁크에 겨우 싣고, 집에 도착해서 땅을 판다. 우리 집 앞에 곧게 선 나무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가을만을 기다린다. 가을이 되면 달콤한 계수나무 향 아래 허리를 펼 새도 없이 낙엽을 치우다 나무를 베어버리기로 작정한다. 아름다운 것을 대할 때 갖고 싶다는 마음 없이 좋아할 수는 없는 걸까, 하던 고민의 답이 여기 있었다. 소유에 책임을 지우면 나는 그것을 쉽게 포기해버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 대신 이야기, 목소리, 노래, 기억을 무책임하도록 끌어 모아 살아가려나. 나에게 계수나무가 없다 해도 이웃집 계수나무가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있다. 아, 나는 정말 한 시도 쉬지 않고 날로 먹는 인생을 간절히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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