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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열 Feb 14. 2018

커피 대신 맥주로 스타벅스를 차려볼까

2월의 맥주 스타우트 : 커피로 알아본 흑맥주의 세계.

까만 맥주라고 다 똑같을 리가


흑맥주라는 말은 참으로 편리한 용어입니다. 색깔만 어두우면 다 흑맥주죠.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위험한 용어입니다. 노랗고 밝은 맥주를 뭉뚱그려서 '황맥주' 혹은 '백맥주'라고 부르지 않는데 '흑맥주'라는 용어만 쓰이는 것은, 어두운 맥주가 소수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맥주 색깔이 까맣다는 것은 그 맥주를 단정짓기에는 너무 작은 특징일 뿐입니다. 까만 맥주를 '흑맥주'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지 않을 때, 비로소 까만 맥주 중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맥주가 있는지 깨달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훨씬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흑맥주'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라거인 흑맥주와 에일인 흑맥주입니다.


라거인 흑맥주는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되었습니다. 바로 10월에 소개된 뮌헨 둥켈 맥주와 12월에 소개된 도펠복입니다. 둘 다 라거 맥주의 본고장인 뮌헨에서, 보리를 타지 않게 볶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탄생한 맥주입니다. 보리가 적당히 그을려 고소한 맛이 가득 들어있으면서도, 오랜 숙성으로 부드럽고 시원해진 맥주들입니다.


이제 에일인 흑맥주를 소개드릴 때가 왔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포터porter와 스타우트stout. 사실 이 친구들은 생각보다 여러분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 유명한 기네스Guiness가 바로 대표적인 스타우트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은 기네스 이야기는 쏙 빼놓겠습니다. 기네스는 곧 독립해서 혼자 글 한 편을 차릴 예정이거든요!


에일인 흑맥주,
바로 포터와 스타우트입니다.



그래서 하이트가 만든 라거 타입의 이 '스타우트'는 사실 스타우트가 아닙니다.


무엇이 그들을 어둡게 하는가


포터와 스타우트 종류는 드넓은 맥주의 세계에서도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한, 섬나라 같은 친구들입니다. 포터와 스타우트에는 다른 어떤 맥주에도 없는 그들만의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왜 이들이 까만지를 알아야 합니다.


맥주를 까맣게 만드는 것은 맥아를 볶는 온도입니다. 보리를 물에 불려 싹틔움으로써 보리를 이루는 녹말을 효모가 먹기 좋게 잘게 분해해준 후, 보리를 볶는 과정을 거치는데요, 이 볶는 온도가 95도 이하로 비교적 낮으면 보리가 타지 않아 황금색 필스너를 만들 수 있는 밝은 색깔의 맥아가 되고, 140~180도에서는 어두운 갈색의 뮌헨 둥켈을 만들 수 있는 카라멜 맥아, 2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는 바싹 타버려 탄내나는 검정 맥아가 됩니다. (김만제 2015)


이 검정 맥아가 전체 맥아의 10%만 차지해도, 무지막지하게 까맣고 뒤가 전혀 비치지 않는 '흑맥주'가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까맣게 탄 보리 맥아는, 로스팅된 커피 원두와 비슷한 맛을 냅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보리랑 커피 원두가 참 비슷하게 생기긴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검정 맥아가 들어간 흑맥주는 마치 커피와 맥주가 섞인 것 같은 '커피 맛 맥주'가 됩니다.


커피 원두와 보리 (사진 : Bigstockphoto(좌) Shutterstock(우))


이 외에도 맥주를 더욱 커피같이 만드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어떤 스타우트에는 '볶은 보리'가 들어가기도 하는데요. 볶은 맥아 말고, 볶은 보리입니다. 물에 불려 녹말을 효모가 먹을 수 있는 당으로 분해하는 과정, 즉 보리를 맥아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보리를 볶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비맥아 보리'라는 용어를 쓰기도 합니다. (번스타인 2015) 맥아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보리만 가지고는 발효를 할 수 없지만, 일반 맥아 사이에 조금 섞여 들어가면 맥주를 더 까맣고 탄내나게 만듭니다.


또한, 보리 낱알의 껍질을 벗기지 않고 볶으면 그 껍질로부터 타닌tannin 등의 부산물이 생깁니다. 이 물질은 맥주에서 바싹 탄 떫은 맛을 담당합니다. (Colby 2014) 라거인 흑맥주 뮌헨 둥켈을 만들 때는 이 껍질을 벗겨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Ramsy 2017) 그 덕분에 뮌헨 둥켈에서는 보리가 잘 구워진 고소한 맛은 나도, 보리가 탄 듯한 거칠고 떫은 원두 맛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 에일 흑맥주 포터와 스타우트에서는 커피 맛이 납니다. 커피라는 음료는 맥주와 참 닮았습니다. 처음 먹어보면 '이게 맛있나?' 라고 생각하기 십상이고, 다양한 종류 사이의 미묘한 맛의 차이를 느끼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이 마셔보고 많이 공부해서 잘 알게 될수록 더 작은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되고, 누군가는 특별하게 느끼지 못하는 한 잔을 위해 더 많은 돈도 아끼지 않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스타우트의 세계에 빠진다는 것은 무궁무진한 또 하나의 예술 장르를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타우트는 수많은 맥주 중에서도 특히 두터운 매니아 층을 가지고 있고, 또 매니아들에게 미묘하고 새로운 맛을 선사해줄 수 있는 장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까지 스타우트의 세계에 깊이 빠져야만 즐길 수 있는 장르는 또한 아닙니다. 커피 맛을 잘 아는 바리스타가 아니더라도, 우리들 대부분은 아메리카노, 카페 라떼 등 다양한 변종 커피 음료를 즐깁니다. 이와 비슷하게, 포터와 스타우트 류의 맥주에는 수많은 변종 스타일이 있습니다. 이 종류의 맥주는 다른 어떤 맥주보다도 첨가물이 잘 어울려 색다른 맛을 내기 좋은, 무궁무진한 응용 가능성을 가진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포터와 스타우트 종류의 다양한 변종 맥주들을, 조금 더 친숙하실 커피 종류에 비유해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영국식 포터 : 아메리카노


후라이드가 맛있어야 모든 치킨이 다 맛있고, 아메리카노가 맛있어야 모든 커피가 다 맛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포터와 스타우트의 가장 기본이 되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바로 영국식 포터porter입니다.


초기의 포터는 정말 조금도 개성있고 참신하고 우수한 음료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더 맛있는 맥주를 만들까?' 하는 고민 없이, 정말 있는 그대로 보리를 볶아 만든 아무것도 아닌 맥주 그 자체였습니다. 포터를 만드는 장사꾼들은, 너무 태우면 떫을까봐 조심해서 볶는 성의조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일 효모와 영국산 홉을 사용해, 약간의 에스테르 향이 나고 영국스러운 점잖은 홉 향이 살짝 드러나며, 보리를 대충 볶아 매우 구수하고 달면서도 약간 탄 듯이 떫기도 한 커피 향의 보리음료, 이것이 바로 영국식 포터입니다. 심지어 당시의 포터들은 대체로 약간씩 상해서 신 맛도 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번스타인 2015) 이 보리음료는 만드는 성의에 걸맞게 싸구려 음료였고, 당시 런던 신사들의 짐을 나르는 천한 짐꾼들이 고된 일을 하던 중 당을 보충하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이 싸고 맛 좋은 보리음료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보리음료에는 짐꾼이라는 뜻의 포터porter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물론 짐꾼들만 마시는 음료는 아니었습니다. 영국 신사들에게 어울리는 고풍스런 음료가 아닐 뿐, 포터는 런던에서 상당히 대중적인 음료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던 중 산업혁명 즈음 페일 에일의 인기가 런던을 덮치면서, (관련글 :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포터를 만드는 양조장에서도 좀 더 질 높은 포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점차 진화한 포터는 아직까지도 영국을 대표하는 맥주 중 하나입니다.


사진 : Bernt Rostad

만들기 나름이지만, 대체로 포터는 볶은 보리를 사용하지 않고 높은 온도에서 볶은 맥아 정도를 사용해, 은은한 커피 향을 풍기면서도 강렬한 떫은 맛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보리의 맛이 꽤 묵직하게 들어있어 뭉근하게 달고 입 안이 꽉 차는 맛인데, 요즘의 포터에는 홉도 어느 정도 들어가 너무 달지만은 않으며 탄산도 기분 좋게 가득차 있습니다. 여러모로, 커피의 쓴 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도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무난하고 맛있는 스타일입니다. 색은 상당히 까맣지만, 앞으로 소개될 스타우트 계열에 비해서는 잘 보면 갈색 같기도 한, 덜 어두운 맥주입니다.


대표적인 영국 포터로는 풀러스 런던 포터Fuller's London Porter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최고의 영국식 페일 에일을 만드는 양조장이자, ESB의 시초를 만든 풀러스 양조장의 작품입니다. (관련글 :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한편, 포터가 인기를 끌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가격대와 세기의 포터가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이 중 도수가 높은 포터를 '스타우트stout 포터'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스타우트는 단단하다, 굳세다, 그리고 술이 독하다 정도의 뜻을 가진 형용사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이름은 스타우트stout로 줄어들었고, 스타우트가 더 이상 포터를 수식하는 형용사가 아니게 되면서, 독하다는 원래의 의미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스타우트를 대표하는 기네스의 알코올 도수는 4.2도에 불과하거든요. 결과적으로 스타우트와 포터는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비슷한 의미의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밀크 스타우트 : 카페 라떼


커피에 변화를 주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누가 뭐래도 우유를 섞는 것입니다. 라떼latte가 이탈리아어로 우유를 의미한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스타우트는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에서 만들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카페 라떼와 밀크 스타우트는 놀라울 만큼 비슷한 위치에 있는 두 음료입니다.


카페 라떼 : https://www.marthastewart.com/1500743/how-make-latte-art


커피에 넣은 우유가 하는 역할처럼, 스타우트에 우유를 넣는 것은 확실히 쓰고 떫은 '흑맥주'의 맛을 부드럽게 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맥주에 우유를 섞는 것은 탄산도 줄어들고, 여러모로 맘에 안 드는 점이 많았나 봅니다. 사람들은 점차 스타우트에 우유를 직접 섞기보다는, 우유의 당 성분인 유당lactose만을 넣는 방식으로 밀크 스타우트를 발전시켰습니다.


유당은 보리의 당 성분과는 달리, 효모의 먹이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맥아즙에 유당을 넣어 발효시켜도 결과물인 맥주에는 유당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밀크 스타우트는 거친 떫은 맛이 많이 중화된 훨씬 단 맥주가 되었습니다.


밀크 스타우트가 1900년대 초반 유행할 때, 밀크 스타우트를 만드는 양조장에서는 하나같이 우유가 들어가 영양이 풍부하고 건강에 좋다고 광고했습니다. 그냥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기네스 역시 건강에 좋다는 마케팅을 펼칠 정도로 당시로서는 건강 상식이 엉망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우유까지 들어갔으니, 밀크 스타우트가 건강에 좋다는 마케팅은 대중들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기네스가 건강에 좋다는 광고


혹여나 이 '맥주 라떼'가 마침내 어린이들의 손에 들어갈까 크게 우려한 영국 정부는 1946년, 이 알코올 음료에 우유milk라는 이름을 넣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BurnSilver) 덕분에 모든 밀크 스타우트는 스위트 스타우트sweet stout로 개명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영국인들의 평균 수명이 얼마나 길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초콜릿 스타우트 : 카페 모카


치킨과 초코는 항상 옳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맥주에도, 커피에도, 누군가 초콜릿을 넣을 생각을 한 걸 보면요.


사실 포터, 스타우트에서는 원래 초콜릿 맛이 납니다. 그 이유는 '초콜릿 맥아'가 들어가기 때문인데요. 초콜릿 맥아는 10% 이하로 들어가도 완전히 까만 맥주를 만드는 검정 맥아black malt와 비슷한 온도에서, 하지만 조금 짧은 시간 볶아낸 맥아로, 초콜릿 맛이 난다고 합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장점 때문에, 대부분의 포터에는 초콜릿 맥아가 어느 정도는 들어갑니다. (England) 라거와 에일을 불문하고, 어두운 계열의 맥주를 품평하는 글에서 '초콜릿 향기가 난다'는 표현을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 초콜릿 맛을 더 강조한 스타우트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초콜릿 맥아를 많이 넣는 방법이 있겠지만, 어떤 맥주는 진짜 초콜릿을 넣기도 합니다. Young's double chocolate stout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초콜릿 스타우트, 혹은 모카 스타우트는 때때로 굳이 따로 분류되지 않고 스위트 스타우트의 범주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카페 모카가 카페 라떼의 범주에 속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서울대입구역 탭하우스 링고LINGO에서 판매하는 스타우트로, 둘 다 초콜릿 맛을 앞세웁니다.


오트밀 스타우트 : 오곡 라떼


2013년을 전후해 한국에 크래프트 맥주 붐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 화제의 중심에는 이코노미스트 잡지에 '한국 맥주가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는 글을 쓰고는 한국에 와서 맥주집을 차린 전 이코노미스트 기자가 있었는데요. (Tudor 2012) 이 분의 '더 부스'를 비롯한 1세대 수제맥주 가게들에서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맥주에 자몽을 넣었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페일 에일을 비롯해, 몇 가지 종류의 크래프트 맥주를 판 것이 한국 크래프트 맥주 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가게들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맥주 중 하나가 바로 오트밀 스타우트oatmeal stout입니다. 오트밀, 우리말로 귀리는 한국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곡물이지만, 서양에서는 굉장히 사랑받는 곡물입니다. 몇 가지 곡물이 들어가 비타민이 가득하다는 여러 시리얼들에 절대 빠지지 않는 영양만점의 곡물이기도 합니다. 북유럽,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많이 생산되는 이 귀리를 영국인들은 스타우트 맥주에 투입해 보았습니다.


영양만점의 귀리는 보리에 비해 단백질과 지방을 많이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맥주에 귀리를 섞으면 맥주의 질감을 무겁게 하고, 혀에 닿는 느낌을 부드럽게 하고, 입 안을 좀 더 가득 채우고, 더 밀도 있고 오래 가는 거품을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오트밀 스타우트라고 해도 귀리가 들어가는 양은 보리의 5% 남짓이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다른 음료가 되지는 않지만, 좀 더 밀도 있고 꽉 차는 느낌 때문에 마치 든든한 아침 식사를 한 그릇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릅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 :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는 물을 타면 아메리카노로, 우유를 타면 카페 라떼로 변신하는 커피 원액입니다. 에스프레소에서 아메리카노가 파생된 것과 반대로 영국식 포터에서 파생되었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마치 에스프레소처럼 걸쭉하고 진한, 그리고 겁없이 한 컵 들이켰다가는 심장이 벌렁벌렁 뛸 만한 스타우트가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저의 글을 빠짐없이 보신 분이라면,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편에서 버턴 지역의 도수 높은 맥주를 좋아하던 러시아 황제를 기억하시나요? 나폴레옹 때문에 러시아로의 맥주 수출이 힘들어져 밥줄이 끊긴 버턴 사람들이 런던의 IPA보다 월등한 IPA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 러시아 황제는 버턴 맥주뿐만 아니라, 도수 높은 영국 맥주라면 다 좋아했나 봅니다. 스타우트 맥주 역시 러시아 황실에서 인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다만, 스타우트는 본래 버턴 맥주만큼 도수가 높지 않아서, 머나먼 수출길에 나서기에도, 보드카에 길들여진 머나먼 러시아 사람들의 입맛에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 사람들은 러시아 황실에 수출하기 위한 용도로 특별히 도수가 무진장 높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도 많이 들어간 스타우트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임페리얼 스타우트imperial stout입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일반적인 스타우트보다 알코올 도수가 두 배는 높습니다. 두 자릿수를 찍는 것은 예사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몇 배로 많은 보리를 넣어야 하고, 그에 걸맞게 홉도 많이 들어갔습니다. 쉽게 말해 엄청나게 진한 스타우트, '스타우트 에스프레소'인 셈입니다.


스타우트는 거칠고 강한 커피 맛 때문에, 페일 에일이나 필스너같은 맥주보다는 원래부터 비교적 부담스러운 맛의 맥주입니다. 그런 스타우트를 두 배로 강하게 만들었으니,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한 잔 먹고 난 다음에는 대체 어떤 맥주를 먹어야 싱겁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뭐든 좋아하다 보면 점점 더 깊이 파고들고, 더 자극적이고 강한 것을 찾게 됩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맥주에서 그 종착역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엔 더더욱 대중적인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그나마 임페리얼 스타우트가 지금처럼 널리 알려진 것은 미국에서 시작된 크래프트 맥주 붐이 수많은 '맥덕'들을 양산했고, 그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서 임페리얼 스타우트에 도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덕분에 오늘날의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그 시초와는 다르게 약간 미국적인 스타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올드 라스푸틴Old Rasputin은 임페리얼 스타우트 스타일의 교과서이자, 알파와 오메가이자, 스타일을 초월한 최고의 맥주로 꼽히는 맥주입니다. 요즘엔 조금 덜한 것 같습니다만, 어떤 크래프트 맥주집이나 바틀샵을 가도 높은 확률로 볼 수 있는 맥주이기도 합니다. 도수가 높고 진입장벽이 높긴 하지만, 그렇다고 매니아들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깊고 진한 보리 맛과, 강하고도 고급진 커피의 풍미와, 미국식 크래프트 맥주에 빠질 수 없는 홉, 그리고 분명 찬 걸 먹었는데 얼굴은 따뜻해지는 알코올이 어우러져 맥주 맛을 잘 몰라도 누구나 감탄할 만한 작품입니다. 단, 한 잔을 다 마시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 처음 드실 땐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걸 다 마시긴 힘들 거라 경고하는 듯한 올드 라스푸틴의 라벨 (사진 : 페이스북 페이지 @oldrasputin)


발틱 포터 : 더치 커피


커피는 뜨거운 물에 우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찬 물로, 대신 아주 오랫동안 추출한 커피가 바로 콜드브루, 혹은 더치 커피입니다. 저는 커피 전문가가 아니라서 더치 커피가 에스프레소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더치 커피만의 그 맛이 오랜 기다림에서 온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마치 라거 맥주처럼요.


영국 사람들은 러시아 황실로만 스타우트를 수출하지 않았습니다. 근처 발틱 해 지방도 영국의 스타우트를 사들이는 주요 고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발틱 지방 사람들은 매우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이 사람들은 영국에서 온 스타우트를 마시면서 '우리도 이런 맥주를 만들어보자!' 라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국은 에일 효모를 특히 사랑합니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뮌헨을 중심으로 이미 라거 효모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특히 발틱 해가 위치한 북유럽은 날씨가 추워 더 낮은 온도에서 발효시키고 찬 곳에서 숙성시키는 라거 맥주가 더 적합했을 뿐만 아니라, (관련글 : 모두가 겉으로만 아는 라거와 에일의 차이) 라거 맥주의 본고장과도 같은 독일과 체코, 심지어 최초로 라거 효모를 배양해 라거 효모의 학명에 양조장 이름을 끼워넣은 칼스버그 양조장이 위치한 덴마크와도 가깝습니다.


발틱 사람들은 영국식 스타우트의 레시피를 도입하면서도, 그 지방의 라거 효모, 근처 독일, 체코 등에서 생산되는 품종의 홉을 사용해 새로운 맥주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발틱 포터baltic porter입니다. 라거 효모를 사용했지만 에일인 영국식 스타우트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영국식 스타우트의 탄 듯한 거친 맛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발틱 포터는 라거와 에일을 조화롭게 짬뽕시킨 대표적인 스타일로 꼽힙니다. 부드러운 라거의 특성에 어울리도록 볶은 보리를 사용하기보다는 높은 온도에서 태운 맥아를 사용했지만, 독일식 라거 흑맥주보다는 좀 더 탄 맥아를 사용해 더 깊은 풍미를 이끌어 냈습니다.




온갖 종류의 흑맥주를 만나보셨지만, 정작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흑맥주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스타우트를 대표하는 맥주, 기네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한 달에 한 종류씩, '이 달의 모범맥주'와 함께 진하고 시원한 맥주 이야기를 배달합니다.

이 시리즈는 대한민국 공군 교양카페 <휴머니스트>에 <이 달의 모범맥주>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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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 수제맥주? 맥주는 원래 수제였다.
10월, 옥토버페스트맥주 메르첸 : 옥토버페스트가 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10월, 뮌헨 둥켈과 헬레스 : 뮌헨 맥주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은 방법

모두가 겉으로만 아는 라거와 에일의 차이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이 독한 맥주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이었다

흔한 맥주라고 다 싸구려는 아니다


참고문헌

김만제 (2015) "The Beer: 맥주 스타일 사전" 영진닷컴
번스타인 (2015) "맥주의 모든 것" 푸른숲
BurnSilver "Milk Stout: It does a body good" https://byo.com/article/milk-stout-it-does-a-body-good/
Colby, C. (2014) "Tannins in the mash" http://beerandwinejournal.com/tannins-mash/
England, K. "Chocolate malt" https://byo.com/article/chocolate-malt/
Ramsy, B. (2017) "How to brew a Munich dunkel" https://gotbeer.com/hop-chatter/how-to-brew-a-munich-dunkel
Tudor, D. (2012) "Fiery foods, boring beer" https://www.economist.com/news/business/21567120-dull-duopoly-crushes-microbrewers-fiery-food-boring-beer
커버 사진에 도움을 주신 심재원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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