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님의 침묵>
그 계절은 분명히 지나갔다.
잎이 다 지고, 공기가 차가워졌고,
낮은 하늘엔 햇살조차 맥이 없었다.
그 사람도,
그 시간도,
그 마음도
모두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그 길목 어딘가에
멈춰 서 있었다.
기억은 참 신기해서,
누군가의 마지막 눈빛을
햇살 드는 커튼 사이에서도 찾아내게 한다.
떠났던 그날 입고 있던 옷의 주름,
문을 닫던 손의 떨림,
돌아서던 발끝의 방향까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사람의 목소리 말고도
그 사람이 흘린 숨결의 공기까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시간은 지나가는데
내 마음은,
아직 가지 못한 채 남아 있다.
한용운의 시를 읽을 때
‘님’은 어떤 사람이라기보다
나에게는 어쩔 수 없이 끝내야 했던 어떤 것처럼 느껴졌다.
꼭 손을 놓고 싶진 않았는데,
붙잡고 있자니
내가 너무 상해버리는 것들.
어쩌면
그게 관계였고,
한때는 나였던 열정이었고,
지켜주고 싶었던 누군가의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갔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보냈다’고 말하기엔
아직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날 이후 나는 가끔
내가 ‘보내지 않은 것들’을 떠올린다.
밤늦게 홀로 걷는 길목에서,
문득 손등에 닿는 바람의 온도에서,
다시 마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는 순간들에서.
나도 안다.
보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걸.
그래야 내가 덜 아프다는 걸.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이 시가
자꾸 마음을 건드린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한 줄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련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조용히 꺼내주는 다짐 같다.
잊으려 하지 않겠다고.
그리움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그 마음 덕분에
오늘도 조용히
내 안의 ‘님’들을 꺼내본다.
어쩌면 보내지 않아도 괜찮은 이별도
있는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