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아테네인들이 가르쳐준 정치수단으로써의 애도
애도(grief)는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이다. 어쩌면 애도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상자를 남긴 국가적 재난이 지나고 나면 국민은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애도한다. 그리고 내 주변의 누군가를 잃은 것이라면 그 슬픔은 배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 어떤 노력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는 슬픔, 그것이 바로 애도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이 감정을 배운 것이 아니다. 단지 어느 순간부터 느끼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말했다. 애도가 정치적인 감정이라고. 애도의 마음은 단순히 개인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또 큰 무리를 형성하는 힘을 지녔다고. 맞다. 슬퍼하는 다수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차가운 4월의 바다가 삼킨 아이들을 애도하는 마음이 어떤 정치적인 힘을 지녔는지 여전히 기억하지 않는가?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이 억울하게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사회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우리는 알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 인간의 근본이 정치적인 도구라 매도되는 것이 딱히 좋지는 않다.
애도가 정치적인 감정이라는 이 주장... 이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대 아테네의 극작가인 소포클레스(Sophocles)는 자신의 역작인 안티고네(Antigone)를 통해 애도라는 감정에 내재되어 있는 강력한 정치적 힘을 표현한다. 반역자이자 자신의 오빠인 폴리네이케스(Polynices)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하는 안티고네는 반역자를 애도하지 못하게 하는 왕 크리온(Creon)과 마주하게 된다. 크리온은 폴리네이케스의 장레를 금지하는 법안을 공표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은 물론 절규하는 목소리로 애도가(dirge)를 부르는 안티고네의 행위는 도시국가 테베(Thebes)의 시민들을 점차 애도의 행렬로 끌어들인다.
장례를 치르고 애도가를 부르는 안티고네의 상례(喪禮; mourning ritual), 그리고 이 상례가 도시국가에 가져온 영향력을 분석해볼 때 애도의 두 가지 정치적 특성이 발견된다. 먼저는 전염성(contagiousness). 애도의 감정은 전염성이 있어 한 사람이 그 감정을 표현할 때 그 표현을 자각한 타인에게 옮겨진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감정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 부른다. 누군가의 감정표현을 지켜본 타인은 그 감정에 쉽사리 동참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한 예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절규를 보는 사람은 그 절규에 동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애도의 전염성이 곧 애도의 '정치적 특성'인 이유는 전염된 감정이 동원(mobilization)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그토록 갈망하고 목메는 이 것, 바로 동원. 내 진영에 더 많은 지지자를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애도의 특성이 바로 전염성인 것이다.
전염성보다 더 나아가 두 번째 특성은 적대감(antagonism). 죽음에 대한 애도는 많은 경우 죽음의 원인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왜 어린 저 아이가 죽어야 했을까? 왜 전역을 코앞에 둔 저 군인이 죽어야 했을까? 만약 그 원인, 즉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를 지목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책임소재를 확실히 할 수 있다면, 이 적대감은 정치적 힘을 지닌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는 힘, 그리고 피해자의 지지자를 모으는 힘, 그것이 바로 책임소재에 대한 적대감에 있다. 단지 애도하는 마음 그 자체만 전염된다면 그것은 그저 슬퍼하는 집단을 형성할 것이다. 하지만 애도에 동참한 집단이 하나의 책임소재를 설정할 수 있다면, 그 분노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한 '사회'에서 이러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안티고네의 애도가는 그녀의 가장 측근인 이복동생 이스메네(Ismeme), 이 비극의 배경을 채워주는 합창단(chorus), 안티고네의 약혼 남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해이몬(Haimon), 그리고 대사는 없지만 행과 행 사이에 그 존재감을 나타내는 도시국가의 시민들에게 점차 영향을 끼친다. 처음에는 왕의 지시를 어길 수 없다며 도시와 법의 중요성을 피력하던 이스메네가 크레온 왕을 저주하며 안티고네와 함께 죽겠다고 소리치는 장면. 크레온 왕의 선전도구로 활용되던 합창단이 크레온을 비판하며 운명이 그를 버렸다고 저주하는 장면. 차분히 아버지를 설득하려던 해이몬이 안티고네 곁에서 자살하는 장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찰한 시민들이 해이몬의 입을 빌려 "도시가 안티고네의 슬픔에 동참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 이 모든 장면들은 위 등장인물들이 안티고네의 상례를 관찰 하며 안티고네의 애도에 참여할 뿐 아니라 크레온 왕에 대한 적대감을 기반으로 점차 그 수를 늘려가는, 정치적 동원의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소포클레스는 애도가 정치적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시민이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동원하여 가해자를 처단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쩌면 애도는 포퓰리즘적 요소를 지니는게 아닐까?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누군가 이 애도에 동감해주고, 이 행렬이 사회적 현상으로 표출될 때, 애도는 곧 포퓰리즘이 된다. 누가 포퓰리즘을 무조건 나쁜 것이라 매도하는가? 이 포퓰리즘적 표상은 민주시민들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표출해주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대표가 시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않을 때, 시민의 목소리가 억압될 때, 사회는 누군가의 죽음을 발판 삼아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수많은 민주 열사들의 죽음이, 노동 운동가들의 죽음이,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대한민국의 구조적 결함을 낱낱이 밝혀준 수많은 이들이 이를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다음 말에 공감할 수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이 글은 석사 논문 "Popularizing Grief: Tragedies and Tragic Events in Ancient Athens" 중 일부를 각색하여 작성했습니다.
3. 생각의 흐름: '가상 사고 실험'으로 FOCUS!
8. 생각의 나눔 2: 사회의 표현 - 언론으로부터 나의 생각을 지키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