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줄 모르는 사람은 기어코 아름다움에 흠집을 내기 마련입니다.
사람인 나도 이백 년을 못 사는데 잉어가 그랬다니요.
그래서 사람인 내가 말하지요, 그 잉어가 이백 년을 살았다는 증거가 있느냐고요.
그런 물음 앞에서야 하나코를 봤다는 증언도 찍었다는 사진도 증거는 아니지요.
이 끝없는 불신자, 뒤틀린 척추 앞에 친구가 증거 하나를 가져다 놓지요.
하나코의 성장륜을 찍은 사진을 말입니다.
하나코의 나이는 나고야 여대 동물학 교수의 검증을 받아 1966년 하나코의 비늘에 새겨진 성장륜을 조사한 결과라고 하지요.
과연 하나코의 성장륜은 비늘 한 조각에 한 세월을 전부 담아낸 모양으로,
시간의 파문이 무수히 겹쳐 만들어진 그것은 마치
무성하게 자란 거목의 나이테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코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잉어로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요.
성장륜으로 잉어의 나이를 측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아
오늘날에는 귀돌을 조사하지요.
2019년의 한 기사에 의하면 귀돌의 나이를 측정한 최장수 잉어는 35살이었고,
잉어의 먼 친척인 빅마우스 버펄로 한 마리가 112살의 나이로 최장수 민물고기에 등재되었습니다.
더불어, 하나코의 나이를 검증했다는 나고야 여대 동물학교수
히로 마사요시 또는 아마노 마사유키로 알려진 이의 연구 자료 또한 찾을 수가 없다고요.
(참고로 고시하라 고메이 박사는 나고야 여대의 총장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이 빼앗고 감추는 생각의 시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
그 의지에 의해 신비 결계가 무너질 때
신비에 감화된 이들은 마음에 상흔을 입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아름다움의 훼손이 정녕 필요한 것일까요?)
하지만 비틀린 척추를 풀어가며 다른 시선으로도 바라봅니다.
집안 대대로 돌보았다는 잉어의 나이를 속여서 좋을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어떠한 말 속에도 파편의 진실, 일말의 믿음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친구의 입장은 모르겠으나, 아마도요.
어쩐지 비단잉어가 오래 살다 갔다는 이야기에는 믿고 싶어지는 측면이 있으니까요.
(이 근거 없이 강력한 힘을 무어라 부를까요.)
여기는 망상의 영역입니다. (훼손에 대한 사죄입니다.)
어쩌면 고시하라 박사는 어릴 때부터 하나코와 함께 자라왔는지도 모르지요.
온타케산의 기운을 타고 흘러오는 계곡물에서
장엄하고도 유유히 헤엄치는 하나코의 모습은
그 이름대로, 소년 고시하라의 눈에는
수면 위에 떠다니는 꽃 한 송이처럼 보였을 테지요.
하나코, 하나코! 하고 부르면(이는 망상이 아닙니다.)
친구의 음성을 알아듣고 저 멀리서도 인간을 향해 헤엄쳐오는 그 잉어가
고시하라의 인생 내내 자랑하고픈 영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먹이를 주는 가문의 손과 손을 거쳐 살아온
하나의 생명을 그는 증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세대와 세대를 건너
기억에서 기억으로 헤엄쳐 온 그 잉어는
진실이라고도 거짓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만 순간적으로(그렇기에 순간 이미지 속에서는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일까요?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기억은 뒤틀리고 전설이 되어
이전의 생과
이후의 생을 만들어가는데
혼돈과 신비가 열어젖히는 전설의 입구 앞에서
하나코는 길을 잃은 채 원호를 그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사랑과 소통에 대한 고시하라의 증언입니다.
하나코, 하나코! 하고 부르면
저 멀리서도 인간을 향해 다가왔다는 그 잉어를 통해
종을 뛰어넘는 사랑과 소통을 느꼈다는 그의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나코’라는 인간의 음성 이후에
수중으로 사료들이 쏟아지는 과정을
수십 년의 시간 동안 학습했을 생존 본능.
그 본능을 소통이라 믿는 종족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본능이란 너무나도 사랑스럽기에
하나의 종은 다른 종을 온몸으로 껴안고,
그 따뜻한 품 안에서
비단결 같은 몸뚱이 하나는
전신을 꿈틀거리며
품고 있던 빛을 난반사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회가 몇 번이나 바뀐 지금, 우리는 물속을 흐르며 반짝이고 있습니다.
출처> 현대문학. 2021. 6
시식평>
그녀가 일본으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사실 홀연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이유는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도 알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홀연히라는 말은 의미를 상실한 건지도 모릅니다. 첫 번째 통화 속에서 주변사람들의 모국어를 듣기도 했던걸 떠올려보면 그 후 그녀가 보내온 풍경사진이나 정갈하고 윤기 나는 음식사진들을 보며 어떤 맛인지 묻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는 그곳뿐만이 아니었지만, 오래전 유효기간이 지난 여권을 찾아볼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보내온 풍경과 풍경에 어울리는 음식들이 윤기를 더해갈수록 그녀가 외로웠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 문득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