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되지 않은 진심이 맺히는 어느 오후
물기가 많은 것을 견디지 못하는 소금은, 수분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이미 녹아 사라질 준비를 한다. 그러나 천일염은 다르다. 바닷물이 스스로 증발하는 시간을 감내하며, 오래도록 햇빛과 바람에 노출되어야 한다. 무르익는 것도 아닌, 썩어가는 것도 아닌, 그저 천천히, 말라가는 것. 이 느린 증발의 시간 속에서 염도는 오롯해지고, 결정은 단단해진다.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문장들은 순간의 언어일 뿐, 아직 염도가 부족하다. 삶의 바닷물에 흠뻑 젖은 생각을 그냥 써 내려가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직 습기를 머금고 있고, 생각의 결이 흐물거리며 흐려진다. 좋은 문장은 증발의 시간을 견디고 난 뒤에야 결정체로 맺힌다. 하루를 써도 하루 만에 마르지 않는다. 초벌 원고는 젖은 평야처럼 어딘가 허우적거린다. 거기에는 덜 여문 감정과 아직 꺼내지 못한 진심이 둥둥 떠다닌다.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글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 이 기다림은 단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햇볕이 들기를 기다리고, 바람이 닿기를 기다리고, 그 모든 것이 우연처럼 아닌 듯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이 침묵은 삭제와도 다르다. 지운다고 해서 마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염도를 끌어올리고, 바람이 문장을 뒤집고, 햇살이 문장의 가장자리를 다려주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이 문장이 천일염처럼 딱딱하고 투명한 결정을 맺는다.
어떤 글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오히려 증발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물처럼, 감정이 응어리진 채로 남아 있다. 억지로 햇볕을 들이밀면 탈이 난다. 너무 급히 말리면 소금 대신 소금기만 남는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생각은 가장 늦게 쓰인다. 오랜 시간을 견뎌내며 결정을 맺은 글은 그 자체로 발효된 고요를 품고 있다. 마치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고 내버려 둔 채반 위의 소금처럼, 그 침묵 자체가 어떤 향을 가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더 가까운 표현은 ‘남기는 것’이다. 바닷물이 떠나고 난 뒤 남은 염분처럼,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는 단단한 문장 하나. 그것은 바다를 닮았지만 바다가 아니다. 쓰는 이는 그 모든 수분의 증발을 목격한 사람이며,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오래도록 배운 사람이다.
천일염은 거칠다. 입에 넣으면 아프다. 혀를 긁는 그 감각은,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운다. 다듬지 않은 문장은 날것의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가공되지 않은 진심은 때때로 날카로움으로 읽히고, 그 날카로움은 읽는 자의 내부를 가른다. 정제 소금을 원하지 않는 이들은 천일염의 투박한 입자 속에서 바다의 기억을 되새긴다. 잘 닦인 글보다 더 오래 남는 문장은, 조금은 투박한 결정처럼 매끈하지 않다. 그 거침은 매혹적인 촉감이다.
일부 문장은 쓰이는 것이 아니라, 채취되는 것이다. 마치 햇볕 아래 바위틈에 맺힌 소금 결정처럼. 그런 문장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일상적인 바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감정의 밀도가 가장 짙은 지점, 사랑과 상실과 후회와 기다림이 쌓이고 쌓여 압축된 심해에서 가끔 떠오른다. 그것을 채취하기 위해선 깊이 잠수해야 하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며, 종종 방향감각을 잃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문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영원히 바다 속에서 결정되지 않은 채로 가라앉아 있다.
한 줄의 문장을 얻기 위해 백 줄을 버리는 일. 다 썼다고 생각한 문장을 다시 지우는 일. 이미 충분한 줄 알았던 생각을 끝없이 다듬는 일. 천일염의 결정이 자라는 동안 아무도 그것을 도와주지 않듯, 글도 혼자서 자라야 한다. 그 침묵의 시간은 고독한 시간이지만, 동시에 가장 생생한 시간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무언가를 견디는 시간. 문장이 문장이 되기까지, 글이 글로서 자신의 형태를 갖기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척을 해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에는 오해가 따라붙는다.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 같은 문장을 열 번씩 고쳐 쓰는 사람. 그 모두가 어떤 결정이 자라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가끔은, 마치 소금의 결정을 부수듯 문장을 부수기도 한다. 그 파편 속에서 염도가 더 짙은 조각이 발견된다. 그런 문장은 끝내 다 쓰지 못해도, 이미 완성된 문장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다림의 시간이 빚어낸 문장이기 때문이다.
어떤 글은, 처음부터 천일염이길 포기한다. 가마에서 뽑아낸 정제 소금처럼, 속도와 효율에 맞춰 찍어낸다. 그런 글은 금세 사라진다. 감정을 흡수하지도 못하고, 남는 것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독자는 소금의 결을 알게 된다. 맛을 기억한다. 한 문장이 혀끝에 남긴 짠맛을, 마음 어딘가가 기억한다. 천천히 스며드는 글이 있다.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기억되는 글. 그런 문장은 시간이 지나도 녹지 않는다.
결국 쓰는 일은 기다리는 일이다. 감정의 바닷물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햇볕과 바람이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문장이 저절로 스스로의 모양을 갖출 때까지. 억지로 적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남게 두는 것. 글쓰기의 본질은 ‘생산’이 아니라 ‘침전’이며, ‘기록’이 아니라 ‘남음’이다.
바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낸 뒤에야 겨우 한 줌의 소금을 남기듯, 진짜 문장은 많은 것을 흘려보낸 뒤에야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고작 한 줌이어도 좋다. 중요한 건 염도다. 아무리 작아도, 그것이 진심이라면, 혀끝에 닿아 마음을 적신다면, 이미 그것은 충분한 글이다.
누구는 소금을 한 줌 얻기 위해 여름 한 철을 내어 바닷물을 퍼 올리고, 누구는 문장 하나를 위해 계절을 통째로 감내한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자잘한 기후의 변화, 문득 스며든 슬픔의 물기, 마르지 못한 감정의 끝자락까지 오래도록 지켜보며 문장을 기다린다. 그렇게 남겨진 글은 때로 날카롭고, 때로 조용하며, 때로는 무색무취의 투명함으로 독자 안에 녹아든다. 그러나 그 맛은 분명히 존재한다. 혀끝에 닿지 않아도, 마음에 스며들어 문득 짠맛을 남긴다.
진짜 문장은 흔적처럼 남는다. 의식하지 않아도 돌아오는, 어떤 계절이나 얼굴, 문득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서 다시 떠오르는 문장. 그것은 오랜 시간 침묵하고 기다린 문장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다. 그리고 결국 그런 문장이 오래 남는다. 사람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천천히 녹아들며, 어떤 결정을 이룬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남기기 위함이 아니다. 다 사라진 뒤에도 한 줌 남을 수 있는 것을 믿는 일이다. 바다처럼. 소금처럼.
오래도록 짜디짠 파도를 품고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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