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맛이 사라지고 오는 문장
물기 많은 것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말랑한 것들, 부드러운 것들, 잘 익은 것들은 곧 무른다. 그 무름을 지나 부패의 시간이 온다. 상하지 않으려면, 상하기 직전의 것을 붙잡아야 한다. 글쓰기는, 어쩌면 그 상하기 직전의 것을 기어코 붙드는 일에 가깝다.
가을의 과실은 달다. 햇살을 품은 사과나 배처럼 농익은 문장들은 처음엔 누구에게나 탐스럽다. 하지만 단맛은 오래가지 않는다. 과즙은 빠르게 증발하고, 남는 건 흐름을 잃은 당도, 즉 끈적임이다. 어떤 말들은 지나치게 달다. 처음엔 유혹하고 끝내는 피로하다. 그런 문장은 땅에 닿기 전 스스로 썩는다. 글이란 결국 부패의 과정과 발효의 과정을 갈라 보는 일이다. 식초가 되지 못한 문장은 그냥 시든다.
식초를 만드는 이는 오래 관찰한다. 처음엔 단맛을 끌어올린다. 설탕이나 과일, 혹은 곡물을 던져 넣고, 시간이라는 그릇에 조심스레 앉힌다. 발효가 시작되면 기포가 생기고, 냄새가 달라지고, 형태가 흐려진다. 어떤 말들은 제 의미를 잃고 어떤 생각들은 본래의 모양을 버린다. 그래야 비로소 발효가 시작된다. 가장 불확실한 순간, 불투명한 시간 속에서 식초는 태어난다. 정확히 언제 무너질지 모를 어지러운 말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 그 지켜봄 속에서만 글은 응집된다.
글쓰기는 언젠가의 실패를 품고 있다. 단지 그 실패가 발효될 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천천히 썩게 두는 것, 그것이 곧 기다림의 기술이다. 설탕물이 술이 되고 술이 초가 되듯, 어떤 문장은 견디며 변질되고, 어떤 감정은 다 썩은 다음 비로소 말이 된다. 발효는 방향이 없다. 위로 가는 것도, 아래로 가는 것도 아니다. 중심 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조용히 형태를 바꾼다. 생각을 붙들어 두려 할수록, 문장은 삐걱거린다. 손을 놓아야, 무언가 시작된다.
말들이 서로를 삭히고, 상처들이 스스로를 녹일 때, 문장이라는 결과물이 생긴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식초는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니다. 쓰고, 톡 쏘며, 때때로 불쾌하다. 하지만 그것이 요리에서 가장 깊은 맛을 만든다. 매끈하고 부드럽고 안전한 말들로는 독자의 입맛을 바꿀 수 없다. 쏘는 문장, 쓰디쓴 기억, 발효된 생각만이 혀를 자극하고 뇌를 흔든다. 좋은 글은 상처의 뒷면에서 쏟아진다. 아팠던 순간을 충분히 삭히지 못한 채 내놓으면, 그것은 그저 신선한 고통일 뿐이다. 그러나 충분히 발효된 감정은 언어가 된다. 그리고 그 언어는 타인의 삶에 침투한다.
글을 쓰는 자는 발효통을 지키는 사람이다. 말들의 온도를 재고, 감정의 기포를 살핀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시간 속에서도 미세한 변화를 감지한다. 발효는 보이지 않는 변화다. 냄새로, 질감으로, 때로는 직감으로만 알 수 있다. 하루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을 때조차, 마음속 어디선가 기포가 일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글을 완성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변화일 수 있다. 그 믿음을 지닌 자만이, 기다릴 수 있다.
누군가는 매일같이 문장을 쏟아낸다. 또 누군가는 일 년 동안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그러나 발효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다. 오래 묵은 감정이 반드시 진한 식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썩어 없어지고, 때론 너무 날카로워진다. 하지만 성공적인 발효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간과 믿음이다. 발효가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자주 뚜껑을 여는 것이다. 문장을 끝없이 들여다보고, 자꾸만 고치고, 다시 덧칠하는 그 불안이 오히려 발효를 방해한다. 글은, 두는 것이다. 믿고, 지켜보는 것이다.
한 문장이 식초가 되기까지는 무수한 오염의 순간을 거친다. 처음 의도했던 의미는 바뀌고, 문장의 순도는 떨어진다. 그러나 바로 그 혼탁함 속에서 진실이 태어난다. 진실은 맑은 것이 아니다. 탁하고, 찌든 흔적이 있다. 다듬어진 날보다 실패한 하루들이 사람을 만든다. 유려한 문장보다 어설픈 표현, 엉킨 구문, 번복된 초안들이 결국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글은 실패를 견디는 기술이며, 동시에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용기의 산물이다.
식초는 시간을 먹고 자란다. 한 줄의 문장을 위해 여러 날을, 혹은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급히 만든 문장은 깊이가 없다. 급히 만든 식초가 사람의 혀를 감동시킬 수 없듯이. 부패와 발효는 언제나 종이 한 장 차이이고, 어떤 글은 그 미세한 균형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불안은 글쓰기의 필수조건이 된다. 완전한 확신 속에서는 단 한 줄의 좋은 문장도 태어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은 자연 발효를 믿었다. 병에 곡물을 넣고, 물을 붓고, 시간을 두면 스스로 식초가 되리라 믿었다. 그 믿음은 근거가 없었지만, 바로 그 믿음 덕분에 최초의 식초가 태어났다. 아무 근거도 없이, 쓰인다는 믿음. 언젠가는 완성된 문장으로 발효될 거라는 막연한 확신. 그 희미한 감각 하나로, 매일 같은 자리에 앉는다.
가장 날카로운 문장은 가장 오래된 감정에서 나온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랑, 더는 아프지 않은 기억, 다 썩었다고 믿었던 고통. 그것들이 다시 발효된다. 그리고 그 문장은 말한다. “시간을 두어, 썩히고, 견디면 결국 쓸모가 된다.” 글쓰기는 식초를 만드는 일과 같다. 시간이, 상처가, 불안이, 그리고 믿음이 필요한 일. 단맛은 금세 질리고, 쓴맛은 오래 남는다. 혀끝에서 스미는 그 한 방울의 진실을 위해, 문장은 오늘도 천천히 삭는다.
말은 곧잘 흐른다. 입 밖으로, 손끝으로, 무의식의 저편에서 무심코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그런 말들은 향을 남기지 않는다. 발효되지 않은 말은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 향은 고요 속에서 태어난다. 부패와 발효의 경계에서, 침묵이 말보다 무거운 순간에서. 모든 문장은 말해지기 전부터 존재한다.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썩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자신을 삭힐 수 있는 적절한 온도를.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문장은 스스로 발효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쓸 수 없는 시간을 통과하고 나서야, 말은 자신만의 산도를 갖는다. 날카롭고도 은근한. 짧지만 깊게 남는. 글이란 남김의 예술이다. 무언가를 덧붙이기보다 덜어내는 일, 기억보다 감각을 남기는 일, 진실보다 여운을 남기는 일.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천천히 잃어가는 일. 글은 상처의 오래된 언어이며, 삶이 오래 발효되어 비로소 쏟아낸, 한 방울의 식초 같은 진심이다. 혀끝에서 오래 남는 그 잔향처럼.
어떤 문장은 읽힌 후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감각으로 남는다.
말을 믿지 않는 이도, 진심의 산미 앞에서는 오랫동안 입을 열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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