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 어떤 글을 보게되었다. 주제의식 없는 글은 일기장에나 쓰라는 글이었다. 그 뒤로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이 어려워졌다. 무언가 확고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할 것 같고, 한 줄, 한 글자 허투루 쓰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 일터도 바뀌었다. 친한 사람 없는 곳에서 적응을 해나가야 했고, 상사와의 면담에서 내가 가진 경력이 주는 편견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힘들었다. 몸까지 지쳐갔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잠만 자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날 괴롭히는 생각은 실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브런치에 올라오는 많은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위안을 얻었고, 내 경력이 만든 편견의 끝은 결국 '잘하네.'라는 평가였다.
그럼에도 한동안 나는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몸은 땅으로 꺼지는 듯했고지금의 평가를 유지하지 못할까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
그때 필요한 주문이 있다.
나는 나의 엄마다.
나는 2년간, 아니면 좀 더 오래전부터 시작된 깊고 깊은 우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부단히 노력했다. 병원에도 가보고 브런치 작가에 도전도 해보고 많은 책과 영상도 봤다.
그중 가장 와닿고 효과적인 주문이 저 주문이었다. 저 주문을 외우는 순간 엄마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떠오르며, 내가 이렇게 소중하고 작고 예쁜 존재임을 각인시켜 준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설거지 한 번 시키지 않는다. 내가 설거지를 하는 소리만 들리면 뛰쳐나와 고무장갑을 뺏는다. 늦은 밤에 퇴근을 할 때도 배고플 나를 위해 이것저것 한가득 요리를 해놓고 기다리신다.
항상 이쁘다는 말을 달고 살고, 남자에게 차여 울 때 살면서 그렇게 가슴이 갈기갈기 씻어지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지금도 가끔 그 일을 입에 담는다.
나는 그 사랑을 나에게 줬어야 한다. 내가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실체 없는 생각으로 걱정할 때, 엄마의 마음으로 늘 그렇게 최선을 다해 잘 해냈으면서 왜 바보같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넌 잘할 수 있다고 말해줬어야 한다.배려받지 못하는 연애를 할 때도 귀하게 키운 나를 그딴 식으로 취급하는 관계는 단호하게 끊어내라고 말해줬어야 한다.
저 주문을 외우면 내 주변으로 아주 빛나고 단단한 보호막이 생기는 기분이다. 온갖 세상의 모멸과 멸시를 튕겨낼 수 있는 보호막. 제발 나는 이제 내가 그 보호막 안에서 행복했으면 싶다.
굳이 내가 이 의식의 흐름에 따른 글을 브런치에 쓰는 이유는, 다시 내가 이 주문을 망각하고 자존감이 낮아지고 걱정에 사로잡힐 때 자주 꺼내보기 위함이다.
또한 나의 일상이 다른 이에게 위로를 줬으면 한다. 내가 여러분들의 글에 위로를 받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받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