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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영 Dec 31. 2023

불안은 성실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유난히 컨디션이 좋았던 날. 신이 난 채로 어디까지 자세를 할 수 있나 시험해 보던 순간, 선생님까지 저 멀리서 콕 집어 이야기하신다.


“허리를 조금 더 숙이세요. 조금 더”


일명 거북이 자세로 불리는 쿠루마 자세였다.



다리를 벌리는 것도 힘든데, 그 사이에 팔을 넣어야 한다니. 그래도 오늘은 컨디션이 좋으니 할 수 있겠지.


뚜둑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더 더 밑으로 내리던 순간,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병원에 가니 두 번째 늑골에 아주 작은 실금이 갔다고 한다.


"이 부위는 딱히 치료를 해드릴 방법도 없어요. 6주 간은 운동하지 마세요. 숨쉬기 운동만 하시라는 말씀이에요. 아셨죠?"


6주라니. 사형 선고와 같았던 진단서를 들고 요가원으로 향했다. 선생님, 저 가슴뼈가 부러졌대요.


이야기를 듣고 놀랜 요가 선생님은 2주를 말했다. 2주는 쉬는 것이 좋겠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요가를 하지 않으면 무언가 삶이 망가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그냥 일주일만 쉬면 안 되나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 그것은 분명히 나의 불안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힘든 환경에서 지낸 사람들은, 내면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외부 활동(일, 취미활동, 쇼핑, 음식 등)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그 활동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얻기 때문에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한다. 조금은 슬프게도, 누군가는 '의지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는 그 행위가 사실은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하는 중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신체의 감정에도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일상생활이 힘들어지는 대가를 감수하면서도 위험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 베셀반데어콜크 저서, <몸은 기억한다>

(*번역에서는 '위험을 경계한다'고 되어 있지만, 문맥상 '위험을 감수하는'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어쩌면 요가 역시 불안을 회피하는 방법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일까? 정말로 나를 위한 운동이었다면, 뼈에 금이 갔을 때 수련을 멈추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워커홀릭들이 그러하듯) 고강도의 수련은 불안을 잠재우고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심장이 뛰고,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오랫동안 지워졌던 나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순간.




"알겠어요. 대신 무리는 하지 마세요. 어차피 가슴 쪽은 통증이 오면 수련을 할 수 없을 거야. 아프지 않은 자세만 하고, 아프면 바로 중단해요."


1주일만 쉬겠다는 말에 선생님은 '그렇게 하라'는 답을 주었다. 신이 난 나는 일주일 뒤 바로 수련을 시작했고, 정확히 3주 만에 가슴 통증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쩌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기간이었다. 부상은 잘못 회복하면 평생 몸에 불편함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그 아슬아슬한 시간 속에서,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3주가 지난 뒤 나의 아사나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 중에는 일터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신체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계속해서 무언가에 매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젊은 시절에는 반짝 빛을 발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삶의 곳곳에서 문제가 터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가족, 동료, 친구와의 관계가 힘들어지거나 혹은 일을 하지 않을 때 도저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진다던지, 하는 격이다.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때로는 끝까지 무너져봐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배우기도 하는 법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쓰러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 로버트 U. 아케렛 저서, <심리치료 그 30년 후의 이야기>


어쩌면 끝까지 가 보아야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인가? 혹은 그전에, 알아차리고 스스로 무언가 결단을 내릴 것인가?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에너지를 멈추게 만들어버릴지도 모르는 '평안함'인가, 혹은 스스로를 담보로 주고 얻어낸 그 '성취감'인가.


부상을 이겨내고 수련을 해냈다는 뿌듯함. 하지만 어쩌면 그 뿌듯함 조차 과거의 굴레일지도 모른다는 찝찝함. 그 모든 것들을 안고 오늘도 매트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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