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반이 이만큼 교정되는데 10년이 걸렸거든. 아마 완전히 돌아오는 데 10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
요가 선생님은 틀어진 골반을 보여주며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요가를 하면 쉽게 교정될 줄 알았던 희망이 단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30년을 그렇게 살았던 거잖아. 그러면 교정되는 데도 30년은 걸리는 게 맞지 않아?
마음도 마찬가지다. 틀어진 마음으로 산 기간만큼, 그것을 치유하는 데에도 그만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분명, 그 기간에 '이거다'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찾아보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맞춰지는 것이 찾아오는 순간. 그러면 그때부터, 치유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심리 상담가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내담자가 있다. 바로 '심리학 공부 좀 했다'는 내담자다. 머리로는 이것저것 아는 게 많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 상담가는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석사를 심리학을 전공하고, 이런저런 책도 많이 찾아보며 나름 치열하게 노력했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은, 나는 머리를 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상담도 여러 번 진행해 보았다. 1시간 내내 말을 하고 상담실 문을 나서면 완전히 기진맥진이 되어 미친 듯이 초콜릿을 찾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나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건데?'라는 질문에는 답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뒤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언제까지 이렇게.라는 말이 이보다 적절할 수 있을까.
하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치유 여정이 시작된 지 정확히 10년 만에, 나는 '소마요가'라는 장르를 만났다.
해부학 공부를 한다고 몸이 잘 교정될까요? 아니에요. 머리로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느끼는 것이죠.
보통 '몸'을 영어로 하면 body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하지만 몸을 뜻하는 또 다른 단어가 있는데, 바로 'soma'다. 사실 이 두 '몸'은 정 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다. body는 '남이 보는 몸'을 뜻하고, soma는 '내가 느끼는 몸'을 뜻한다. 즉, 소마요가는 '스스로 몸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요가'를 뜻한다.
그리고 이런 소마적인 감각을 활용한 심리 치료 기법이 바로 '감각운동 심리치료'다.
요가 전 나의 몸은 한 덩어리였고, 나의 마음은 조각조각 나뉘어 있었다. 요가 후 나의 몸은 조각조각 나뉘었고, 나의 마음은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 B.K.S 아헹가
과거에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자동적으로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차단시킨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피드백하는 신경 회로가 차단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신경 회로가 차단되면 우리는 '나'라는 것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때부터 모든 신체적, 정신적 아픔이 찾아오게 된다.
이 신경 회로를 회복시키기 위해 소마 요가는 아주 작은 움직임을 반복한다. 자극적인 감각이 아닌, 일상적인 감각도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운동 심리치료를 활용한 트라우마 치료는 일상에서 인지하지 못했던 감정을 몸을 통해 인지하는 방법을 알려준다.(자세한 설명은 뒤편에 계속.)
그렇게 '몸'을 통해 '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랜 치유 여정은 이 두 가지를 함께 시작하며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몸의 모든 감각을 허용하며, 그리고 안정된 몸이 무엇인지 체험하며 깊이 휘몰아치고 있었던 회오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지, 하지만 사실 나는 단 한 톨도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는 깨달음.
알고 보니 누구보다 불안에 떨고 있었던 마음, 하지만 직면하는 순간 마법처럼 찾아오는 평온함.
이제는 조금 달라지고 싶다는 의지, 어쩌면 지금 이대로도 모든 것이 괜찮았다는 자각.
이 모든 것이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질 때.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라는 질문의 답이,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나오기 시작할 때. 나의 마음은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