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함, 과도한 생각, 그리고 이로 인한 우울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이는 우리의 인간성을 증명하는 일면이기도 하다.
주저함, 생각, 우울감의 무한 굴레 속에서 변화를 일으켜 벗어나는 열쇠는 작은 성취감이다. 얼마나 작은지는 상관없다. 내가 "이런 것 가지고? 성취감이라고?' 생각이 든다면, 충분한 걸 찾은 것이다. 변화는 그 작은 것을 하는 것에서 일어난다. 그 작은 것이 변화라고 믿으면 된다.
나는 주저함, 과잉 사고, 우울감에 사로잡힐 때면 주로 이불을 정리한다. 각 잡고 개는 것이 아니라, 이불을 정리하려면 먼지가 날 것이니 창문을 먼저 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그것을 그냥 하는 것'이다. 깔끔하게 할 생각도 없다. 지금은 내가 생각한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할 뿐... 먼지가 나든 말든, 남이 또는 심지어 내가 나중에 보기에 '저게 정리한 거야'하든 말든, 그냥 휘- 들어서 한 번 툭- 털면서 그대로 침대에 가라앉게 한다. 그리고 내가 한 것을 보고 뿌듯해한다.
"오 잘했어. 맘에 들어."
그 '작고 성의 없는 이불 정리'는 더 깊은 본질을 보면 그 크기가 크고 내 성의가 가득한 행동이다. 주저함, 많은 생각, 우울감이 밀려와 내가 영향받을 때,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행동으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동이자 가장 성의 있는 행동이다. 그 행동은 시작이며 가능성이 된다. 다음 행동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할 수 있는 행동이며 가능성. (주로 그다음은 물을 한 잔 마시는 것이다.)
이불을 정리하고 물을 한 잔 마시는 행동은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고, 또 행동은 그다음의 행동을 일으킨다. 이어지고 이어지고.. 그다음 이어지고...
작은 성취감은 그 양이 쌓이고, 그 양은 나의 기분과 정신을 변화시킨다. 정신이 변화하면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에너지도 달라진다. 그렇게 음의 연쇄가 양의 연쇄로 변화한다... (나중에 내가 '정리한' 이불 보면 웃기고 재밌다. 여기에 사진을 찍어 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침대 모양과는 동떨어진 독립적인 모양의 '정리된' 이불의 모습을.)
중요한 것 그 하나만 생각한다. 중요한 건 작은 성취감이었고, 그 성취감은 지금 할 수 있는 작디작은 행동 하나를 다른 생각 없이 하는 것으로 이룬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지..?"라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자리에 앉아 있다면 일어나는 것, 누워 있다면 몸을 돌리는 것, 숨만 쉬고 있다면 깊게 숨을 들이쉬는 것 등등등, 모두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일련의 경험이 누적이 되면 '다시 주저해도 괜찮다'는 믿음이 생긴다.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주저함이나 우울감이지만 이 감정들에 사로 잡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다시 작은 성취감을 실천하고 양의 연쇄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작은 성취감의 행동만 실천하면 양의 연쇄는 만들어진다. 경험은 방법을 알게 한다. 방법을 알면 두렵지 않다. 다시 주저해도 괜찮다는 믿음은 곧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일이 되며, 즉 실패가 아닌 시행착오로 명명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그렇게... 나에 대한 믿음이 자라난다... 다시 괜찮아질 수 있다는 믿음. 회복 탄력성.
내가 인간이기에 당연히 느끼는 감정들을 미워하지 말자. 사실 미워하고 좋아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렇구나..."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쉬어도 된다. 감정은 나를 챙겨보라는 신호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나를 살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살뜰히 살피자. 그리고 '내가 너무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면 아주 작디작은 성취감으로 나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자.
"나는 왜 이럴까?"
왜는 없다. 인생에 답이 없는데 왜라는 것이 왜 있나. 그저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새 '그래, 뭐 어때'라는 마음가짐에 이르렀다...
나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있다. 다시 괜찮아질 수 있다는 믿음. 다시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총체, 나를 믿고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의 여정을 기쁘게 걸어가 보자. 나란 존재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항상 맞는 답이다.
우리 기억은 점점 무뎌져서, 내가 생각하고 판단한 것도, 곁의 사람들과의 추억도 사라져 가고, 남아 있는 것은 나도 알 수 없는 버릇, 막연한 규칙들이다. 세상은 어렵고 그것을 감당할 능력은 없기에, 우리는 어떻게든 단순하게 살고 있다. 막막하다. 그럴 때 '나란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