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 수영장에 몸을 담그다
짙어지는 가을날에 아이들과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창밖을 내다보니 바람이 쌩쌩 불고 있어서 나갈까 말까 열 번쯤 고민하다가 휘날리는 낙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쨍하게 비치는 해를 보고 ‘그래도 한 번 나가보자’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옷을 두 겹, 세 겹씩 껴 입히고 나도 기모가 풍성한 옷을 입고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왠 걸,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참 다행이다’ 싶은 그 순간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분다.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아이들과 요리조리 옮겨 다니면서 놀다가 이제 아이들은 놀이터를 가고 싶단다. 집 근처에 있는 놀이터는 양쪽으로 아파트에 둘러 쌓여 있어서 해가 잘 비치지 않는다. ‘거기서 놀면 추울 텐데..’ 싶었지만 미끄럼틀을 타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냉큼 놀이터까지 누가 빨리 가나 달리기를 하면서 뛰어갔다. 놀이터는 역시나 해가 잘 들지 않아서 더 춥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눈 오는 날에 밖에 나온 강아지들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닌다. 때마침 쌩쌩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이리 휘날리고 저리 휘날리면서 마치 아이들이 낙엽과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춥지도 않은지 계단을 뛰어올라 미끄럼틀을 타고 슝 내려오기를 수십 번, 추워서 그런지 놀이터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사람이 없어서 마스크를 벗고 뛰어놀 수 있기에 좋다는 첫째 아이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래, 실컷 놀아라.’ 숨바꼭질을 하고 달리기 시합을 하고 또 하고 그렇게 볼이 새빨개지도록 한참을 놀이터에서 놀았다. 어느 순간 놀이터를 휙 둘러보니 놀이터 한쪽으로 누가 모아놓은 것 마냥 은행잎들이 노랗게 쌓여 있었다.
아이들은 ‘우와 낙엽이다!’를 연신 외치며 곧장 은행잎이 쌓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더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위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어느 좋은 호텔에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나오는 그 표정으로 말이다. 두 아이는 은행잎 수영장에서 그렇게 한참 동안 자신만의 오롯한 시간을 즐겼다.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바람이 뒹굴거렸고 아이도 낙엽을 따라 뒹굴거렸다.
그림책 속의 프레드릭은 겨울에 먹을 식량을 준비하는 다른 들쥐들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몰두한다.
계절을 마음껏 즐기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계절을 마음껏 즐기고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지금 나의 계절은 어디쯤 와 있을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고민하느라 걱정하느라 내 눈앞의 멋진 계절을 보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끄럼틀을 탈 때에는 계단을 밝고 미끄럼틀 앞에 올라가서 엉덩이를 미끄럼틀에 붙이고 몸을 살짝 앞쪽으로 밀어야 미끄럼틀을 탈 수 있다. 만약 그 미끄럼틀을 타기 무서워서 머뭇머뭇한다면 결국 무서워서 미끄럼틀을 타지 못하게 된다.
나는 내 삶이라는 미끄럼틀을 재미있게 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미끄럼틀이 얼마나 길지, 어떤지 몰라서 무서워서 타지 못하고 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일까. 미끄럼틀을 타보지 않으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그 순간에 얼마나 스릴이 있는지, 재미있는지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점점 색이 짙어지는 단풍처럼 내 삶도 계절에 따라 색이 짙어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내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온전히 느끼면서 살아가고 싶다. 고민과 걱정을 자꾸 비워내야지. 나무는 단풍이 들지 않을까, 열매가 맺히지 않을까, 꽃이 피지 않을까, 비가 내리면 어떻게 할까, 비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순간순간의 상황에 온 힘을 다하는 그것이야말로 수천 년을 살아내는 나무의 힘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낙엽과 함께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미끄럼틀도 서른 번쯤 탄 다음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의 손을 만져보니 꽁꽁 얼어 있어서 내 두 손으로 꼭 감싸줬다. 이제 장갑을 끼고 놀아야겠다.
"프레드릭, 넌 왜 일을 안 하니?" 들쥐들이 물었습니다.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프레드릭이 대답했습니다.
"프레드릭, 지금은 뭐해?"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프레드릭, 너 꿈꾸고 있지?"
"아니야,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 기나긴 겨울엔 얘깃거리가 동이 나잖아."
...
프레드릭이 커다란 돌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눈을 감아 봐. 내가 너희들에게 햇살을 보내 줄게..."
프레드릭이 햇살 얘기를 하자, 네 마리 작은 들쥐들은 몸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레드릭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요?
마법 때문이었을까요?
그림책 [프레드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