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동료가 초등학교 1학년 짜리
아들이 혼자 집에 있어서
밥을 어떻게 챙겨줘야 할지
전전긍긍 걱정을 하길래
“배달시켜 주면 안 돼? “ 했더니
요즘 세상이 무서워서 안된단다.
아이가 없었던 때라
내 비교대상은 나의 어린 시절이었는데
그때와 지금은 세상이 너무 달라졌단다.
아이가 생긴 지금,
부모가 된 지금은
조금은 그 걱정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30년 사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게 바뀐 걸까
아직 잘은 모르겠다.
내 나이 아홉 살.
7남매 중 막내아들인 우리 아빠의
노쇠한 80대 부모이자 나의 조부모님들은
우리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큰 아들네 갈 거다, 막내네 안 간다던
옛날 옛적의 할머니는
중풍으로 혼자선 앉으실 수도 없는 몸으로
병원생활이 의미 없다는 판정으로
큰 아들네 갈 수 있는 선택지가 없어
효자중에 효자인 막내아들네로 오시게 되었다.
그땐 몰랐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에 같이 산다는 게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9살짜리가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할아버지 밥 차려드리러 가게 될지도,
긴 병에 효자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하게 될지도,
화목했던 우리 네 식구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흩어지게 될지도,
엄마아빠의 얼굴에 웃음이
영영 사라지게 될지도.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내 나이 9살.
병들고 가난흔 노부모를 모시며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그 일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를.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해 주고
사랑으로 키워준 부모일지라도
자기의 가정을 가지게 되면
돌봄의 우선순위에서 미뤄지게 되고
그래야 내 가정만이라도 지킬 수 있다는 게
차가운 현실이자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라는 것도.
뭐든 때가 되어서 아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너무 이르게 세상을 알아버린 나에게
세상은 그저 이겨내야 하는 곳이었다.
가난하지 않도록 경쟁에서 이겨야 했고
구김 없이 자란 것처럼 보이려 타인에게 밝아야 했다.
그 안에서 나는 나를 잃어갔다.
내 삶의 모든 중심이 외부로 향해있었다.
나는 서른여덟이 되어서야
외부로 향해있는 내 에너지를
죽을힘을 다해 내부로 돌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내 아이에게
세상은 이겨내야 하는 세상이 아닌
그래도 살만한, 존재 자체로 괜찮은
그런 세상이었으면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