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의 개구리가 밖으로 나가고 싶다며 열망하는 것이 좋은 건가, 허락된 하늘과 부족하지 않은 음식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좋은 건가. 아니면 그 열망과 감사를 모두를 품고 사는 것이 좋은 건가. 우물 밖의 개구리가 드넒은 광야를 떠돌다 목이 마르고 허기가 졌는데, 이토록 달콤한 파라다이스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 우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면 어떤가. 그래서 우물 밖의 개구리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었고 다시 열망과 감사로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면 그건 또 무슨 일인가. 장자의 <소요유>에는 그늘을 찾아 쉬는 매미가 너무 좋아서 정신을 놓고 있다가 사마귀가 자신을 먹으려는 것을 알아채리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사마귀는 매미를 잡아 먹을 생각에 너무 기뻐 그 뒤에 까치가 자신을 먹으려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좋다는 것과 나쁘다는 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실제로 나는 흥망성쇠를 겪고 바닥에서 꿈틀대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해도 이해가 된다. 물론 나는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복 받았다.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테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인 거 같다. 혹자는 그런 나를 두고 감정이 매말랐다고 하거나 승부욕이 없다거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말로써 나를 폄하하고는 했다. 나는 그런 폄하가 당연하다 못해 그게 나인가보다 했다. 혹자는 그런 나를 두고 초월의 경지라는 둥 쓰잘데기 없는 말로써 에둘렀다. 그것도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지만 열망과 감사를 동시에 품고 있다. 그것은 어느 한곳에 치우쳐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중용이라던지 중도라던지 그런 거창한 것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아주 덜떨어진 부류에 가깝다. 하나의 성공은 피나는 노력과 몰입에서 겨우 달성할 수 있는데, 얼렁뚱땅 어설픈 생각과 나태 그리고 우유부단함으로는 이도저도 안 된다. 이곳저곳 들락거리다가는 이도저도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 앞에서는 절절맨다. 여하튼 결론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겠다와 어떻게 살고 싶다의 중간 지점에서 맨날 방황한다. 하지만 나는 매미나 사마귀는 되지 않을 것이고, 우물밖이나 안에서 무엇이든 열망과 감사에 살 것은 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