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있는 삶은끝까지 아름답다.
살아갈 이유도 의미도 없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
직업상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흥망을 보아 왔다.
그런데 정말 실패하여 주저앉은 사람 대부분이 술로 하루하루를 때우다 여러 가지 이유로 죽은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삶의 의미를 잃었기에 분명 그들의 삶은 살아있는 육신(肉身)에 갇힌 감옥살이가 되어 하루하루 연명하다 그렇게 놓은 삶의 끈은 더 이상 그들을 잡아주지 못하고 끊어졌다.
위와 같은 이유로 얼마 전에 갑작스러운 면역력이 약화로 돌아가신 분이 있었는데 생전에 나하고 두어 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파일럿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관생도 시절 파일럿 검증에서 탈락한 것이 인생 실패에 시작이었다고 했다.
자신은 파일럿을 꿈꾸었지, 장교를 꿈꾼 적이 없었기에 직업군인생활 시절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결혼을 하여 두 자녀를 낳았지만,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에 가정에서도 다정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군에서 전역을 했으며 얼마 안 가 이혼을 하고, 규율에 묶인 군 시절 자유를 꿈꾸며 배웠던 색소폰 연주를 업으로 삼아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색소폰 강의는 경제적으로 늘 부족함을 느끼게 했기에, 물려받은 땅으로 부동산 개발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어진 실패에 자신은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다며 아침밥 대신 술을 먹으며 내게 이야기한 자신의 삶이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후 그의 부고장을 받게 되었다.
10년 가까이 술에 찌들어 살다. 어느 날 쓰러져 병원 무균실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죽었다고 했다.
그의 나이 갓 오십이었다. 100세 시대를 감안하면 그분의 죽음은 분명 요절이었다.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다 간 허무한 죽음이었다.
1970년대 후반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정도면 참으로 똑똑한 청년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다 허망한 죽음에 이른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최악의 삶의 현장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살아나 위대한 책을 남긴 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나치의 '아우슈비츠'수용에서 살아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남긴 빅터 프랭클린 박사이다.
정신의학과 의사답게 그는 로고테라피라는 정신 치료요법을 주장했는데, Logos(로고스)는 그리스어로 '의미'라는 뜻으로 그는 인간 존재의 의미는 그 의미를 찾아 나서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춰 로고테라피를 주장하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위대한 말을 인용하는데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이 말을 시작으로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무엇이 인간을 살게 하고 또 죽게 하는지에 대해 체험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사람은 어떻게든 살고자 노력한다.
물론 개중에는 살고자 하는 목적에만 매달려 나치에 협조하며 부도덕을 저지르지만, 올바른 의미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타인을 해치지 않고 숭고한 모습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성욕에 기초한 정신분석학이나 융의 콤플렉스에 기초한 분석심리학이 의사로서 환자들의 임상적 결과를 가지고 설명했다면, 빅터 프랭클린은 자신의 극적인 경험에서 나온 정신 치료법으로 학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 스스로의 삶에 실현하고자 하는 유일하고도 개별적인 목표가 있을 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부모가 주는 것도 아니오, 스승이 일러 주는 것도 아니오. 멘토가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위대한 여정인 것이다. 또 그 의미가 반드시 위대해야 하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좌절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거듭된 좌절이 우리에게 성공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까?
너무 높이 나르다 태양에 의해 날개가 녹아 떨어진 이카로스와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아들임을 뽐내고자 태양 마차를 끌다 아폴론의 벼락을 맞아떨어져 죽은 파에톤의 교훈을 기억한다면 너무 높거나 많은 것을 바라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이 없음에도 높이 날아 결국에 죽음이라는 파국을 맞이하였듯. 너무 높거나 허황된 의미를 설정한다는 것은 필시 좌절이라는 파국을 통해 그 어떤 삶의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 수 있음을 기억하자.)
눈 내린 아침 출근길 눈 위 몇 사람의 부지런한 이들의 발자국과 함께 사람이 가지 않는 곳 위엔 길고양이의 발자국 만이 있었다.
인간에게 환영받지 못한 채 그 주위를 배회하며 길 위에서 살아가는 길고양이.
하지만 그 고양이들은 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간다.
부지런히 밤새 먹을 것을 찾아다니고 사랑하고 새끼를 낳아 모성애로 늘 모자란 먹을 것조차 양보하며 그 새끼들을 키운다.
언제 병들어 죽거나 로드킬 당할 모르지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신이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준 듯 하루하루 길고양이로서의 삶에 충실한 모습을 보면서 늘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본능대로만 살 수 없다.
하지만 그 인간이기에 본능대로 사는 동물보다 못한 삶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 이유는 삶의 의미를 잃거나 아직 찾지 못해서 일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숭고한 삶의 자세를 잃지 않게 지켜 준다는 삶의 의미.
그 의미를 스스로 찾아 삶이라는 아름다운 여행을 즐길 수 있어야겠다.
너무 높아 좌절하지 않고 작은 만족에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소박하지만 힘이 넘치는 의미를 찾아 힘차게 삶의 여정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