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크리스마스와 연말로 이어지는 극성수기 시즌에 저의 가족은 동남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제 업무로 인해 저와 아이만 외국에서 잠시 지내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저와 아이가 외국에서 지낼 동안 한국에서 (즐겁게?!) 홀로 지냈던 배우자를 위해, 외국에서 돌아와 학교에 적응하느라 애쓴 아이를 위해, 외국에서 독박으로 업무와 육아를 해내고 돌아와 곧직장에 돌아갈 저를 위한 여행이었어요.
가족이 떨어져 지냈던 시간, 새로운 동네로의 이사, 아이의 학교 적응 등 몇 년 동안 이어졌던 가족의 큰 이벤트들을 무사히 끝낸 것에 안도하면서, 새해부터 다시 시작될 맞벌이 부부와 부모로서의 일상을 잘 꾸려나가 보자는 의미로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배우자와 아이는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나라로 수영하러 간다는 것에 제일 열광했지만요. 연말에 처음 끊어본 비행기 티켓과 호텔 숙박 비용은 비성수기 시즌의 3배도 넘는 듯 했습니다. 비수기에 세 가족이 유럽 여행갈 수 있는금액을 성수기라고 동남아에 쏟아 붓는 느낌이랄까요. 그렇지만 저와 배우자는 평일이나 비수기에 길게 휴가를 쓰지 못하는 소심한 직장인들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비싸게 간 만큼 더 즐겁게 지내고 내년에도 열심히 살아보자며 잘 다녀왔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1월 초, 12월 카드 값을 정리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살펴보니 그 달 역시 내야 할 카드 대금이 어마어마 하더라고요. 극성수기! 따뜻한 동남아!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아이 겨울방학 특강! 스키강습! 방학이니 각종 검진!을 예약했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지출이었다며 빠르게 합리화하고통장에서 카드 금액을 선결제해 나가는데, 이상했습니다. 결제해야 하는 카드 값이 남았는데, 1억이 넘는 마이너스 통장 한도가 꽉 찼더라고요.
12월 말에 급여를 이미 받았으니, 다음 주 카드 결제일이 다가올 때까지 입금될 돈은 일 원도 없었습니다. 마이너스 통장도 한도까지 꽉 채워 썼으니 카드 값이 연체될 상황에 부딪힌 겁니다. 성실한 소시민인 저는 이유를 막론하고 카드값이 연체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이 통장 저 통장을 뒤져 겨우 카드 값을 낼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만들었습니다. 간신히 한숨 돌리고 1월달 예산을 살펴 보는데, 더 큰 일이 생겼습니다. 1월 중에 자동이체 될 각종 대출이자와 공과금을 낼 돈이 없더라고요. 12월 말에 들어온 급여는 이미 12월 카드대금으로 다 사용했고, 마통한도도 꽉 찼고, 다른 통장에 들어있는 작은 돈들도 이미 끌어모아 카드 값으로 냈으니까요.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시기에 이사하지 않고 계속 지낼 수 있도록 집을 매입하면서 마이너스 통장을 최대치로 끌어썼습니다. 정부에서 주택담보대출을 한창 옥죄고 있을 때 집을 매수한지라 마이너스 통장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집을 매입하고 세입자 분께 전세금을 돌려드리고 나니, 입주할 때 배우자와 저의 마이너스 통장 금액은 1억 7천만 원을 넘어갔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육아휴직 중이었기 때문에 저의 가정은 외벌이 체계였어요. 배우자 급여로 매달 생활비며 대출이자를 충당하는 것 만으로도 벅찼습니다. 마이너스 통장 이자만 해도 월 50만 원 이상 나가니, 기본 비용만으로도 월 100만 원 넘게 적자가 났습니다. 이사하느라, 가족들 생일 챙기느라, 명절에 부모님 챙기느라 등등 생활비가 추가될 이유는 늘 넘쳐났습니다.
제 생애 마지막 휴직이라는 (이상하게도 비장했던) 생각에 아이와 놀러도 많이 다녔네요. 휴직의 장점을 백분 활용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평일에 롯데월드도 가고 캐리비안 베이도 다녀오곤 했습니다. 영화도 전시회도 평일 낮에 마실삼아 아이랑 보러 다니고요. 주중에 혼자서 계획 세우고 예약까지 끝내 놓고서는 배우자에게 '주중에는 회사 직원이었으니, 주말에는 아빠 역할에 충실하라'며 주말에 나들이며 여행도 다니고요.
배우자가 가끔 받아오던 성과급이나 상여금들은 잠시 마이너스 통장을 채웠다가 어느 새 다시 카드 값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렇게 1년을 지내고 연말에 해외여행까지 다녀오자 마이너스 통장 금액은 1억 8천만 원을 기록했습니다. 1년 동안 천만 원 적자였던 거죠. 당시 1억 8천만 원은 금융기관에서 저와 배우자가 갚을 수 있다고 최대치로 정한 금액이었습니다.
적금을 깨거나 주식을 팔지 않으면 더 이상 카드 값을 낼 수 없는 날이 오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외식을 덜 했어야 하나, 아이를 학원에 덜 보냈어야 하나, 숨만 쉬고 살아도 한 달에 100만 원씩 적자가 나는 데 국내며 해외며 철마다 여행을 다닌 것은 철없는 일이었나, 뒤늦게 반성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