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고요가 가득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마을에도 변화가 있다면, 버스와 사람이 주로 다닌 행길, 신작로라 부르던 메인 스트리트가 마을 안길(골목)이 되고,
수리조합 옆 작은 뚝길이 큰길이 되었다. (큰길이라 해봐야 2차선이지만 차가 왕복으로 다닐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발전이다.)
그 뚝길에 서서 봉월교회가 보이는 마을을 바라본다.
기분이 오묘하다.
나는 자랐는데 그대로인 마을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대로인 것 같은데,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닌 게... 그 수리잡*에서 개헤엄을 치고, 얼음을 지치던 꼬맹이들이 거기 하나도 없는 게 쓸쓸하다.
종이 회수권을 쓰던 시절에는 마을에 초등학교도 있었고 집집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제법 있어 등하교 시간, 시내버스는 언제나 만원이었다.
교회와 성당이 가깝게 있어서, 교회종이 울리는 시간, 성당 종이 울리는 시간이면 각자의 종교활동을 위해 마을 안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이동하는 모습이
줄지어 움직이는 개미떼 같기도 했다.
명절 대목을 지날 때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떡방앗간과 쌀방앗간을 중심으로 행길이 사람들로 붐볐던 그런 마을이 이제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
*마을과 평야를 사이에 두고 폭이 2미터쯤 되는 도랑이 있는데, 그 도랑을 수리조합이라 불렀다. 수리조합은 수리잡으로 발음이 바뀌고, 뜻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수리잡이 마을 냇가를 부르는 말인 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 물길에 꽤 많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빨래 계단도 있었다. 사계절 내내 엄마들은 수리잡에서 빨래를 했고, 아이들은 여름엔 물놀이, 겨울엔 얼음놀이를 했다. 어린 나는 그 물길이 농사를 위해 인공적으로 지어진 물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시멘트 벽이 있는 냇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설 아리랑을 읽으면서 그 수리조합이 일제가 조선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지 면적을 늘려 쌀과 토지를 침탈하기 위해 대규모로 계획하고 설립한 시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을 도랑은 농사량을 늘려 더 많은 쌀을 빼앗기 위해 만들었고, 그 쌀을 군산항까지 빠르게 나르기 위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새로 길을 낸 게 신작로라고 한다. 내가 지겨워마지 않던 그 풍경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이 숨어있었다는 게 새삼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