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5.18.토.
십수 년 전 어느 여름날의 일이다. 당시 어떻게든 사업을 꾸려 나가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던 나는 가족과 가족 아닌 사람을 가리지 않고 돈을 융통하여 썼다. 그러다보니 장기로 융통한 돈의 이자를 물고 단기로 융통한 돈을 갚느라 아무 정신이 없었다. 이와 함께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상적인 업무로 자유롭지 못했으니 몸과 마음의 피로로 숨이 턱에 차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바로 그날 낮은 밤처럼 어두웠고,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점점 세를 부풀려 윈도우 브러시를 돌려도 전방 주시가 힘들만큼 세차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나는 그날 오전부터 서울 시내를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기획안을 들고 찾아간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프로젝트의 진행을 파기하였다. 그 프로젝트를 통하여 다만 얼마라도 돈을 융통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나는 크게 실망했다. 터덜터덜 나오는 중에는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뉴질랜드로 이주한 전임 사장으로부터였다. 그에게 매달 얼마간의 금액을 지불하기로 하고 사업을 인수한 것이었는데, 몇 달째 지급을 보류 중이었다.
구차한 변명으로 겨우 상대를 달래며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의 짐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 날은 직원들의 월급날이었는데, 나는 갚아내야 하는 돈들과는 무관하게 모자란 월급을 지불하기 위하여 또다시 돈을 융통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거래처의 주차장으로부터 차를 돌려 빠져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기가 진동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관리하던 아버지의 돈을 나에게 빌려주었던 동생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돈이 내게로 흘러 들어온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바로 그 아버지에게 급하게 돈을 써야 할 일이 생겼으며, 그렇기 때문에 서둘러 몇 천 만원의 돈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 적시의 통보 전화였다. 나는 마침 반포대교를 건너는 중이었는데 여기서 핸들을 꺾어버리면 가드레일을 넘어 다리아래로 떨어지게 되는 걸까, 그러면 살아남을 수 없을테고, 그러면 그제야 나는 이 지옥 같은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헛것 같은 체념의 상상으로 넋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리를 건너고 꽉 막힌 도로에 들어서서야 전화 통화를 끝낼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 우비를 입은 한 남자가 내 차의 본네트에 손을 짚은 채 다른 한 손을 휘휘거리며 젓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가 끊어진 것도 모른 체 차를 움직이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차를 막고 선 그 사람은 우비를 입고 있는 경찰관이었다. 경찰관의 수신호를 따라 겨우겨우 차를 교차로에서 빼낼 수 있었고 잔뜩 화가 난 경찰관은 차를 길가 쪽으로 인도했다.
운전석 창을 내리자 잔뜩 화가 난 경찰관의 얼굴이 열리는 중인 차창을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날이 궂어 어지간하면 넘어가려 했으나 당신 같은 사람은 보다 보다 처음이고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언성을 높였다. 꼼짝없이 딱지까지 끊어야 할 판이었으나, 나는 모든 것이 헝클어져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상황에서 그 경찰관에게 뭔가 대꾸를 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 날, 그러니까 장밋빛 계약은 사라지고, 서너 곳에서 빚 독촉이 한꺼번에 쳐들어오고, 동시에 돈까지 구걸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기세 등등한 경찰관으로부터 범칙금 고지서를 발급받기 직전이었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장 즐거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딱지를 떼지 않고 경찰관으로부터 풀려났다. 그 빗속에서도 씩씩거림이 느껴지던 경찰관은 우비 안에 있는 고지서를 꺼내 올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더니 바로 옆 건물 일층 처마 밑으로 가서 한참을 우비와 씨름하던 경찰관은 빗속을 뚫고 내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하고 고지서를 받아들려는 제스처를 취하는 내게 말했다.
“당신 정말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인 줄이나 아쇼. 내가 어떻게든 우비 안에 있는 고지서를 꺼내려고 했는데, 지금 우비의 단추가 고장이 난 것인지 열리지를 않소.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얼른 가도록 하시오.”
그런데 화가 잔뜩 난 경찰관을 남겨두고 자리를 떠나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보고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네,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 몇 번이나 운이 좋은 사람,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혼잣말을 하던 나는 급기야 눈물이 나올 정도로 크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났더니 놀랍게도 직전까지 나를 휘어잡고 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한순간 저만치 물러났다. 손 끝까지 죽음이 다가왔다고 절망하였던 내가, 누군가에게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엉킬대로 엉켜 있다고 생각되던 나의 만 가지 문제를 훨씬 간명하게 보도록 만들어 주었다. 나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기획안의 수정을 지시하였고, 수수료의 지급을 독촉하던 사람에게는 현재의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한 뒤 지급을 위하여 내게 필요한 시간을 정중하게 부탁하였다. 동생에게도 전화를 걸어 내가 만들 수 있는 돈과 시기를 알려주며 양해를 부탁했고, 지인을 통하여서 직원들의 월급 또한 융통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넓은 벌판을 걸어가고 있는데 사방에서 불길이 일어나 불 속에 포위되었다. 그곳에 미친 코끼리 한 마리가 잡아먹을 듯이 사납게 덤벼드는 바람에 도망을 치다가 마침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 나무에 올라갔다. 코끼리는 나무 위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나무에 얽혀 있는 칡넝쿨을 잡고 매달렸는데, 그 아래에는 크고 깊은 우물이 있고, 우물 속에는 용이 되려다 실패한 이무기 세 마리가 떨어지면 잡아먹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물가에는 뱀 네 마리가 사람 냄새를 맡고 눈을 부라리며 잔뜩 노려보고 있다. 칡넝쿨을 오래 붙잡고 매달려 있으니 점점 힘이 빠지고 손이 저려서 마침내 떨어질 듯 말 듯…… 설상가상으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칡넝쿨을 한 가닥씩 갉아 먹고 있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마침내 칡넝쿨이 얽혀 있는 나무 사이로 구멍이 나 있어, 벌이 그곳에 꿀을 쳐 그 꿀방울이 똑똑 떨어지니 말할 수 없이 두려운 가운데서도 달콤한 꿀 한두 방울 받아먹는 재미에 무서움도 잊어버리고 매달려 있는 지경이다. 이 상황에서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 조용헌의 <조용헌의 사찰기행>에서 발췌한 ‘안수정등 岸樹井藤’의 화두
그리고 나는 그 당시의 나의 상황이 바로 ‘안수정등’의 화두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넓은 벌판과도 같은 삶을, 생로병사의 불길 속에서 죽음을 항상 목전에 둔 채 근근이 목숨을 유지하며, 갖가지 욕망과 지수화풍의 어려움으로 힘겨운 가운데에서도 작은 달콤함으로 연명하는 우리들을 빗대고 있는 화두가 바로 안수정동의 화두인데, 바로 그 날의 내가 마치 이 이야기 속의 난감한 사람인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낙차 사고와 그 수습의 과정에서 정말 오랜만에 이 안수정동의 화두를 다시 떠올렸다.
나는 대퇴부경부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내고정술로 수술의 방향을 정했다.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내 나이를 고려하고 향후 운동 능력을 좀더 유지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입원 다음날 오전에 가능할 줄 알았던 수술은 오후로 연기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병인 중증근무력증이 발목을 잡았다. 마취과 의사는 만약을 대비하여 중환자실을 잡은 다음에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고, 중환자실이 확보된 다음에는 전신마취가 아닌 부분마취로 수술 준비를 해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척추에 주사를 놓는 부분 마취는 결국 실패했고 결국에는 전신마취를 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 후 예닐곱 시간이 지난 새벽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고 중환자실에서였다.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면서 확보된 중환자실 침상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주치의의 결정이었다. 밤새 섬망으로 소리를 지르는 노인의 건너편에서 나 또한 비몽사몽으로 밤을 보냈으며, 아침이 되어서 서른 두 시간 만에 식사를 했고, 아홉 시가 넘어 도착한 아내와 함께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
4인실인 간호간병 통합서비스의 병실에서 그 후로 사일을 더 지냈다. 지하철에서 낙상한 교장 선생님과 아들의 만류에도 자꾸 수술 부위를 만져서 혼이 나는 노인, 무릎에 넣었던 고정쇠를 빼내는 수술을 받은 수다스러운 중년의 남성이 나의 환우들이었다. 수술 후 이틀 뒤 목발을 구매하여 연습을 시작하였고 다음 날에는 소변줄을 뺐다. 그리고 응급실에 들어온 토요일로부터 육일이 지난 금요일에 드디어 퇴원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마냥 좋을 것 같았으나 현실은 달랐다. 병원에 있는 동안 사라졌던 현실감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오롯이 살아났다. 출근이 불가능하니 집에서 회사 업무를 보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야 했고, 목발을 짚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탓에 일상의 공간에서 가능한 동선을 확인해야 했다. 방문에는 턱이 없어 괜찮았지만 화장실에는 한뼘 높이의 문턱이 있어 목발을 짚고 그 턱을 건너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발에는 힘을 줄 수 없었고 목발은 익숙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방에 설치된 문틀 철봉을 화장실 문으로 옮겨 설치할 수 있었고 나는 그 철봉에 의지하여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마음을 먹었으나 망설이고 있던 철인3종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는 DNF를 할 지언정 DNS를 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DNS는 Did Not Start의 약자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아예 출발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DNF는 Did Not Finish의 약자로 이런저런 이유로 경기를 시작은 했으나 끝마치지 못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부상이 회복이 되는 과정 동안 기억하고 기록할 철인3종의 이야기가 안수정등의 화두 속 꿀방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어차피 화두에 정답이란 없으니, 지금의 내가 답 없는 길을 걷게 되겠구나, 혼잣말을 하고 났더니 우울감이 조금은 희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