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자란다, 아이가 자란다, 나도 자란다
여름의 끝자락 텃밭에는 그 해 겨울 김장을 위한 배추와 무를 심는다. 배추는 모종으로 심고 무는 씨앗으로 심는다. 무 씨앗을 심을 때는 한 구멍에 한 알의 씨앗을 넣는 것이 아니라 3-4알의 씨앗을 함께 넣는다. 어떤 씨앗은 발아에 실패하기도 하고 또 어떤 씨앗은 벌레들에게 먹히는 경우도 있으니 안전하게 여러 알을 심는 것이다. 무가 아직 어린 새싹일 때는 서로의 몸을 의지해 바람을 견디며 자라기도 한다.
씨앗을 심고 한 달쯤 지나면 무 싹이 어느 정도 자라나고 자기들끼리 자리다툼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솎아내기가 필요하다. 가장 튼실한 싹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뽑아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뽑아버리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글다글 키워보기도 했는데, 제대로 솎아내기를 해 주지 않으면 모든 무가 총각무 정도의 크기로 작게 자란다. 제 때 솎아내기를 해 주어야 모양도 예쁘고 크기도 적당한 매끈한 무로 자라날 수 있다. 식물이 자라는 데는 적절한 빈 틈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빈 틈이라는 단어를 보니 얼마 전 TV에서 본 초등학생의 하루 일과가 떠오른다. 방과 후에 밤늦은 시간까지 학원 스케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저녁밥은 학원으로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 간단히 해결한다 말하는 아이의 얼굴이 삶에 지친 중년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TV에 나오는 특별한 아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주변 초등학생들만 봐도 피아노, 미술, 태권도에 영어 수학 학원까지 기본으로 다닌다고 하니, 이에 따르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테고 아이도 참 바쁘겠다 싶다. 과연 무엇을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다들 이 정도는 한다고 말하며 모두가 동일한 경쟁에 뛰어드는 현실이 안타깝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창의력과 사고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각종 매체들에서는 창의력과 사고력을 키우는 교육에 대해 다양한 방법들이 넘쳐날 정도로 소개되고 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사고하며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식물들이 적당한 틈이 있어야 잘 자라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빈 틈이 필요하다. 아이가 마음껏 공상하고 상상할 수 있는 시간, 뛰어놀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며 심심해하는 시간,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시간, 친구들과 역할놀이를 하며 투닥거리는 시간 등, 아이의 삶에도 빈 틈이 필요하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를 정해 집중하고 나머지는 과감히 솎아내기 하여 아이에게 충분한 자유 시간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듯, 아이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독서다. 책을 통해 말과 글을 배우는 것은 물론 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사고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독서의 생활화를 위해 거실 중앙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TV를 없애고 그 자리에 큰 책장을 들여놓았다. 그림책 한 세트를 들여 매일 몇 시간이고 책을 읽어주었다. 아직 말도 못 알아듣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책을 읽어줄 때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며 그림책을 바라보며 엄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아이의 모습이 좋아 계속 읽어주었다. 아이를 무릎에 앉혀 책을 읽으며 교감을 나누었다. 몇 년간 이어진 책 육아는 아이의 삶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에는 집에 있는 책들을 외워 따라 말할 정도가 되었고, 따로 한글 공부를 할 것도 없이 아이는 절로 한글을 깨치고 글을 줄줄 읽어 내려갔다. 신기했다. 독서의 위력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동생이 태어나면서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줄었다. 아이는 동생을 돌보는 엄마 옆에 붙어 앉아 책을 읽어달라고 칭얼댔고, 참다못해 스스로 책을 읽어나갔다. 자연히 읽기 독립을 했다. 조그만 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입을 달싹이며 책을 읽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이에게 책은 재미있는 친구로 자리 잡았다. 독서의 연장선상에서 초등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독서 논술 토론과 관련된 사교육을 꾸준히 받고 있다. 학원에 다니기 싫어하는 아이라 다양한 학원에 다니지 못했지만, 이 학원은 유일하게 아이가 즐겁게 다니고 있는 사교육이라 아이의 만족도도 높고 나도 독려하는 부분이다.
초등 고학년에 들어서니 영어, 수학 등 교육에 쏟아야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영어 수학 공부로 분주했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아이는 ‘엄마, 저 오늘 이 시간까지 책 한 권도 못 읽었어요! 너무 바쁘잖아요!’라며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다들 한다는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 아이의 소중한 독서 시간을 빼앗는 결과가 생기곤 한다.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아이의 기준에 맞는 공부를 해 나가야겠다 깨닫는 순간이다.
또 한 가지 꾸준히 하고 있는 활동은 주말농장에서 텃밭을 일구는 일이다. 흙을 만지작거리며 작물을 돌보는 일은 아이가 누군가를 소중하게 대하고 연약한 존재를 지켜주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의 특성이, 식물을 돌보는 손길에서는 이타적으로 바뀜을 본다. 작은 식물이 행여나 목이 마를까 물을 떠다 주고 시들해진 모습을 보면 마음 아파한다. 흙을 토닥이는 손길에서 타인의 아픔을 토닥여주는 마음을 배운다. 콘크리트 길만 밟고 사는 아이들이 주말에라도 흙길을 걸으며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저 멀리 산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계절의 바뀜을 알고 자연의 신비로움을 경험하고 자연 속에서 커간다.
몇 년간 텃밭을 일구며 아이들은 씨앗을 뿌리면 싹이 트고 자라나고, 꽃이 피었다 진 자리에는 열매가 맺힌다는 자연의 섭리를 몸소 터득한다. 열매를 얻고자 한다면 때 맞춰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보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이를 달성하기 위해 길고 험난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남의 집 아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신경 쓰고 그에 따라가려 발맞추기 전에 내 아이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하고 키워나가도록 애쓴다면 아이들은 더욱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리라 생각한다. 우리 아이는 일찍부터 읽고 쓰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가만히 내버려 두니 방과 후 한두 시간가량 필요한 공부를 한 뒤, 이후 시간은 온전히 읽고 쓰고 그리며 보낸다.
“엄마, 작가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작가를 꿈꾸는 아이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노력이 필요하겠다며 글쓰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를 생각해본 아이는 그렇게 자신만의 행복한 삶을 스스로 일구어 가고 있다. ‘안데르센’처럼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를 쓰는 작가가 꿈이라 말하며 자신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의 모습이 대견하고 예쁘다. 꿈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겠지만, 아이가 꿈을 찾고 노력하고 살아가는 그 과정이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도 아이는 거실 바닥을 뒹굴며 책을 읽는다. 멀쩡한 책상 놔두고 왜 거기서 뒹굴고 있냐 한마디 하고 싶지만 잔소리는 목구멍으로 꿀꺽 삼켜버린다. 자신만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아이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럴 시간에 나는 또 책상에 앉아 나의 책을 읽고 나의 글을 쓴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분리되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