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자란다 아이가 자란다 나도 자란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지인과 커피를 마시기로 한 날이다. 코로나 이후로 두문불출했으니, 정확히 2년 하고도 4개월 만의 커피숍이다. 아이스라테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씩을 손에 들고 마주 앉았다. 아이 공부 이야기, 남편에 대한 얘기를 조금 나누다 이내 대화의 주제는 ‘엄마들의 일’로 이어졌다.
오늘 만난 셋은 모두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둔 전업맘들이다. 아이들이 점차 커감에 따라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는데 이 엄마들도 그랬나 보다. 유치원 교사였던 한 엄마는 최근 유치원 선생님들이 병가를 내거나 코로나로 격리될 때 임시교사로 종종 일을 나가고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일을 하고 적게나마 다시 내 힘으로 돈을 버니 좋다며 환하게 웃었다. 다른 엄마는 막상 다시 일을 하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고, 풀타임 근무를 하기에는 아직 아이가 어려 고민이라 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 다가왔다. 고민에 대한 뚜렷한 대안을 얻지 못한 채 신데렐라처럼 다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 다시 일할 수 있을까요?'
오전에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 맴돈다. 일 하면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아이를 하루 종일 누군가의 손에 맡겨두고 마음 졸이며 일을 한다.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사정이 낫다. 그렇지 못한 경우 맞벌이 가정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지난 코로나 상황에서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가지 못할 때 아이들만 집에 두고 출근해야 하는 부모들의 어려움이 컸다.
직접 아이를 돌보고 싶은 마음에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면 아이의 어린 시절을 오롯이 함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후의 경력단절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되돌아가고 싶어도 사회는 이미 변해있다. 경력이 단절된 엄마들은 자신들이 해오던 일자리로 돌아가기 어렵다. 급격히 줄어드는 출산율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육아를 위해 일을 그만두고 사회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을까? 아이가 커감에 따라 엄마들도 다시 사회로 발을 내딛을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거실 창가에 있는 화분 속 망고와 아보카도 나무에서 시선이 멈춘다.
망고나무와 아보카도 나무는 자연 속에서 집채보다 크게 자라나 주렁주렁 열매를 매다는 나무다. 열대기후에서 자라나야 할 이 나무들이 어찌 대한민국 한 가정집 거실의 작은 화분 속에 꽉 끼어 살아가고 있는가. 오도 가도 못하는 나무들이 마치 우리네 엄마들의 신세와 비슷하다. 화분 속 나무들은 작은 화분 안에서도 어떻게든 존재를 드러내고자 이리저리 뿌리를 뻗어 내려가 보지만 화분에 막혀버리고 뿌리는 화분 속을 빙빙 돌며 뒤엉키고 만다. 햇빛과 영양분이 부족하니 가지와 잎은 성장이 더디고, 꽃과 열매를 피워내기도 쉽지 않다. 육아라는 틀에 묶여 멀리 뻗어나가지 못하는 엄마들의 아쉬운 마음을 화분 속 나무에게 빗대어 본다.
작은 화분에 몸을 끼워 넣은 망고가 안쓰러워 큰 화분으로 옮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분갈이를 위해 화분에서 나무를 꺼내려는데 화분 가득 뿌리가 들어차 잘 빠지지 않았다. 물을 흠뻑 뿌려 흙을 좀 무르게 한 다음 화분 가장자리를 살살 흔들어 간신히 망고나무를 빼냈다. 뒤엉킨 뿌리는 막막한 내 마음만큼이나 복잡하다. 큰 화분 아래에 흙을 조금 채워준 뒤 망고나무를 넣어주었다. 커다란 몸집이 한결 편안해 보인다. 웅크렸던 뿌리를 뻗어내고 영양분을 빨아올릴 나무를 생각하니 내가 다 행복하다. 이곳에서 네 꿈을 펼쳐보렴.
망고나무가 더 큰 화분으로 나아간 것처럼 사회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던 엄마들도 세상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을까? 엄마라는 자리에서는 제한된 활동만이 가능한 상태이지만, 그 자리에서도 사부작사부작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잎을 뻗어나가는 엄마들을 본다. 아이들이 잠자는 새벽,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운동을 하며 체력을 기르고, 자신만의 빛나는 시간을 꾸려간다. 비록 화분 속이라는 제한된 영역 안에서의 일이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몸을 키우고 뿌리를 넓힌다면 다시 더 넓은 세상 속으로 들어갈 기회가 오지 않을까? 조금 더 넓고 큰 화분으로 계속해서 몸을 옮기다 보면 언젠가 열대우림 숲으로 자리를 옮겨 마음껏 열매 맺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화분 속 나무들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엄마들도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