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하며 알게 된 삶의 맛들_5
주부에게 방학은 곧 생존의 계절이다.
아니, 사실 방학이 아니라 ‘밥학(밥을 학습하는 시간)’이라 해야 맞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시 세끼를 책임지는 삶은 엄마들에게 가히 밥의 시험과 같다.
냉장고 문을 몇 번이나 열고 닫으며, 어떤 재료가 남아 있는지와 떨어진 건 무엇인지 체크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이렇게 냉장고를 열고 닫으며 재료 현황을 살피다 보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작은 ‘가상 요리 방송’이 시작된다.
“네~ 오늘의 메뉴는요~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시금치는 송송 썰어 눈에 띄지 않게 계란말이에 넣어 볼 거고요. 또,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등어를 바삭하게 구워서 준비해 봅니다! 김이 빠지면 섭섭하니까, 김 한 접시도 곁들여드릴게요~“
그런데, 이 요리 방송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엄마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진다.
기분 좋고 체력이 충만한 날이면, 몇 가지 반찬을 뚝딱 만들어 식탁을 꽉 채운다.
하지만 바쁜 날이나 긴 하루의 피곤함이 몰려온 날엔 ’원팬 요리의 마법사‘로 변신한다. 한 팬에 모든 재료를 넣고 끝내버리는 덮밥이나 비빔밥은 그런 날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그렇게 방학마다 분주하게 밥상을 차리는 일상 속에서도, 나에게는 매 끼니를 준비할 때마다 반복되는 특별한 의식이 있다.
바로 ‘제철 음식 검색하기.‘
달력을 넘길 때마다 “이번 달 제철은 뭐지?”하고 자연스레 손이 휴대폰 초록색 창으로 향한다.
이 의식이 처음 시작된 건 결혼 첫해 겨울, 신혼집 근처 시장에서 꼬막을 사던 날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춥고 바람이 매서운 날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빨간 바구니 안에 층층이 쌓인 꼬막이 어쩐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 소쿠리 단돈 5천 원~” 가게 아저씨의 말에 혹해 꼬막을 카트에 담고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꼬막 샀는데 어떻게 손질해요?”
“꼬막? 쉽지 않을 텐데~ 겨울이라서 제철이라 많이 나왔나 보네~ 맛있겠다! 그거 해감해서 삶아서 무쳐 먹으면 돼.”
역시나 간단한 엄마의 조리법을 들으며 집으로 와 레시피 검색을 하면서 보니 정말로 꼬막은 겨울 제철 음식이었던 것!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지?”
단지 추운 겨울이면 늘 엄마가 해주시던 꼬막무침이 떠올랐던 것뿐인데, 그런데 그 일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제철 음식에 대한 내 본능은 계절마다 어김없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봄이 되면 어느 날 갑자기, ”달래 간장 비빔밥이 먹고 싶네!“ 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여름에는 마트에서 옥수수를 보자마자 달고 고소한 맛을 상상하며 결국 사고야 말았다.
가을에는 쫀득하고 달콤한 새알심이 들어간 늙은 호박죽이 떠올라, 집안을 퍼지는 호박 냄새로 온기를 가득 채웠다.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생각해 보니, 답은 분명했다. 엄마였다.
어릴 적 엄마가 늘 식탁에서 하시던 잔소리들이 이제는 내 DNA에 깊이 새겨져 버린 게 분명했다.
“이거? 지금 제철이라 싸고 맛있지. 겨울엔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음식을 먹어야 해~!”
“계절에 맞는 거 먹어야 몸도 덜 상해.”
그 당시에는 잔소리처럼 느껴져서 한쪽 귀로 듣고 흘렸지만, 성인이 되고, 엄마가 되고 보니 그 모든 게 내 몸속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흔히 기억을 머리로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몸도 수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내가 엄마가 되어, 내 아이들에게도 같은 잔소리를 남긴다.
“겨울 시금치는 비타민이랑 철분이 많아서 키도 크고 힘도 세지는 음식이야~! 추운 겨울을 버티고 그 끝자락에서 나오는 나물이라 더 맛있어!”
아이들이 묻는 한마디. ”철분이 뭐예요? 비타민은요? “ 나는 열심히 설명한다.
아직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 하겠지만, 어느 순간 기억의 어느 편에서 떠오르겠지.
“아, 엄마가 방학마다 이 반찬을 꼭 챙겨줬었지.” 하고.
한 계절을 지나가며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는 건 참 아름다운 일이다.
봄이 오면 향긋한 달래를 떠올리고,
여름이 오면 옥수수의 고소함을,
가을이 오면 호박죽의 따뜻함을 떠올리는 것.
제철 음식은 단지 신선한 재료 그 이상이다.
그건 햇살과 바람, 온도의 조화로 만들어진 자연의 선물이고, 계절이 우리에게 건네는 특별한 위로다.
게다가 가족을 잇는 기억의 다리가 되어준다.
여름 수박 한 조각이 더위를 식혀주듯, 겨울 꼬막무침 한 접시는 추위를 견디는 힘을 준다.
그리고 그 음식을 통해 만들어지는 기억은 우리가 마주할 수많은 계절을 잘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밥에 담긴 맛과 그 시간이 가진 따뜻함이 우리 가족에게 오래오래 남기를 바라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여름을 잘 나기 위해 삼계탕을 끓인다.
이 한 그릇 안에 내가 담을 수 있는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담아.
플러스 세대를 이은 제철 잔소리까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