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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고. 쓴다.

by 회색달

운동화를 신을 때, 잠깐 망설였다. 오늘은 그냥 쉴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발끈을 묶고 나니 이미 늦었다. 이 정도 의지면 충분했다.

큰 결심은 아니어도, 몸이 먼저 움직이면 마음은 따라온다.


집을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양팔을 벌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게 몇 번 호흡을 정리하자, 어느새 길 위에 서 있었다. 공원을 지나고, 벤치를 몇 개 지나면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셔틀콕이 공중에서 몇 번 오르내리다 떨어지고, 사람들의 탄식과 웃음이 섞여 들렸다.


가끔 나를 스쳐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처음엔 괜히 따라가려다 금방 포기했다.

누군가는 하루를 쫓고, 누군가는 자기 속도로 걷는다. 나는 그 중간쯤 어딘가에서 달린다.

속도를 내는 것도, 멈추는 것도 아닌, 그냥 오늘을 흘려보낼 수 있는 나만의 속도다.


10km를 달리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처음엔 단순히 살을 빼기 위해서였다. 제일 무난했다. 하지만 달리다 보니, 이유보다 습관이 남았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마음은 그 뒤를 따라왔다.


하루의 끝에는 일기를 쓴다. 처음엔 운동 기록이었지만, 지금은 하루의 흔적이 됐다. 어떤 날은 아무 말도 못 쓰고 빈 페이지만 저장했다. 그것도 일기다. 쓸 말이 없다는 건, 그만큼 잘 버텼다는 뜻이니까.


운동과 글쓰기는 닮았다. 처음엔 귀찮고, 중간엔 힘들지만, 끝나면 후련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하게 된다. 달리다 보면 생각의 밀도는 옅어진다. 그 바람에 가라앉아있던 마음이 슬쩍 얼굴을 꺼내기도 하고.


요즘은 천천히 달린다. 발끝이 닿는 느낌, 볼을 스치는 바람, 강변에 반짝이는 윤슬까지 보고 있으면 속도를 낼 수가 없다. 누군가에겐 심심한 풍경이겠지만, 나에겐 아니다.


글도 비슷하다. 누군가는 강한 감정으로 글을 쓰지만, 나는 평평한 문장을 좋아한다. 큰 사건도, 거창한 깨달음도 없이, 그냥 오늘 있었던 일을 적는다. 공원에서 본 사람, 스쳐간 그림자, 달리다 마주친 커다란 강아지와 아저씨. 사소한 기록들이 쌓여서 결국 나를 만든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몸을 훈련하는 일과 닮았다고. 근육이 기억하듯 문장도 기억한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움직인 만큼 문장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게 전부다. 어떤 특별한 결과는 없다. 바라지도 않지만.


문장하나를 썼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접속사나 형용사 대신 쉼표를 찍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벌어진 사건이나 상황에 의미보다 습관과 감각에 집중할 줄 아는 사람도 되고 싶다고. 힘이 넘치는 글이 아니어도 좋으니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10km를 완주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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