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 가식, 배려 그 어중간한 어딘가.
철없던 학창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별명을 지어주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가 튀어나온 친구에겐 ‘당나귀’라고, 볼살이 빵빵한 친구에겐 ‘피글렛’이라고 별명을 지어줬다. 키가 작은 남자인 친구에겐 ‘귀엽다’는 말을 남발했다. 남의 약점일 수도 있는 부분을 사정없이 콕콕 찌르고 다니곤 했던 것이다. 악의는 전혀 없었다. 그 당시엔 그게 나의 친해지는 방법이던 것 같다. 어떤 친구들은 내 철없는 장난을 받아주었고 그런 친구들과는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내 말에 상처를 받거나 예민하게 반응하면 난 그 친구들이 쓸데없이 예민하다고 생각하여 멀리했다.
그 친구들이 예민했던 것이 아니라는 건 대학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다. 신입생 딱지를 뗄 무렵 술자리에서 친구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스스럼없이 사람들의 단점을 지적해서 너무 당황했다고. 그래서 무례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내보니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며. 너는 단지 너무 솔직한 것 같다고.. 그럼 점을 고쳤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같이 술자리에 있던 여러 명이 그 말에 공감을 표했기에 솔직히 충격이었다. 솔직한 것이 장점이라고 믿고 살아온 나에게 역으로 솔직한 친구들의 발언이 상처로 다가올 줄이야.
그렇다. 나에겐 솔직한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뭐든지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입 밖으로 표출했다. 비겁하게 뒤에서 말하는 것이 싫었다. 뭐든지 앞에서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내가 말해 줘야겠다는 쓸데없는 오지랖까지 가지고 있었다. 나라도 말해 줘야 그 사람이 그 단점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말 철없는 생각이었다. 솔직한 것은 절대 나쁜 게 아니지만 ‘어떻게’ 솔직해지느냐는 참 어려운 문제다. 내가 가공 없이 솔직한 발언을 했을 때 누군가는 상처를 받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때도 많았다. 나는 그 유명한 ‘팩트 폭행’이라는 폭행을 일삼고 다녔던 것이다. 다행히도 친구들 덕분에 나의 잘못된 부분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살짝 통통해진 지인이 “나 너무 살쪘지?”라고 물으면 이제는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보기 좋아.”라고 말한다. 가식적인 걸까..? 배려인 걸까..? 여전히 가식적인 것이 싫지만, 쓸데없는 솔직함으로 상처 주기도 싫다. 나는 솔직한 발언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재고 있다. 솔직함을 나누려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친밀도.. 그리고 잘 골라진 단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때라는 것이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요즘의 나는 계속 타이밍을 재다가 솔직해지지 못한 채로 관계를 유지해나갈 때가 많다. 그 관계는 적어도 발전은 없을지언정 평화롭다.
미숙한 나는 계속해서 배려와 가식, 솔직함 사이를 저울질하며 헤맨다. 적절한 때를 찾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