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공허해서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며 달렸다.
병가휴직 99일째. 어젯밤 잠자리에 들며 갑자기 기운이 없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타이레놀을 먹고 바로 잠이 들었다. 푹 자고 늦잠을 자니 조금 나아졌다. 열한 시쯤 기상했던 것 같다. 보다 말았던 애니메이션 마지막 회를 끝까지 보았다. 짧아서 아쉬웠지만 나름 볼 만했다. 아내는 점심 약속이 있어 나 혼자 식사를 했다.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했다. 미국 드라마 수퍼내추럴 시즌 13의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는데 아내가 빨리 돌아와 조금 놀랐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게 벌써 8년 전이었고, 그때가 내가 28살 때였다. 애증의 드라마였다. 이후 독서를 시작했다. 마음의 숲, 퇴사도쿄, 블록체인에 대한 책들을 읽었다. 저녁은 오랜만에 소고기를 먹었는데, 바로 속이 안 좋아졌다. 퇴사준비생의 도쿄는 틈틈이 읽느라 한참을 읽었는데, 잘 읽었다. 일본인의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여러 아이디어가 인상 깊었고, 우리나라와 비교해 부러움이 들기도 했다. 밤에는 아내에게 오래간만에 쓴소리를 했다. 핸드폰을 너무 봐서 뭐라고 했더니 아내가 토라졌다.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병가휴직 100일째. 열 시 반에 기상하여 거실로 나와 블록체인 혁명에 대한 책을 읽었다. 아내는 TV를 보며 핸드폰을 하느라 바빴다. 그런 아내를 신경 쓰지 않고 책을 읽다가 배가 출출해져 열두 시쯤 콘푸로스트를 먹었다. 블록체인 혁명은 읽을수록 이론서 같았다. 다가올 미래의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어느덧 쉼 100일을 맞이했다는 사실에 시간이 참 빠르다고 느꼈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을 반납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피곤해져서 잠시 졸았다. 아내가 함께 옆에 있지 않고 따로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해서 좀 서운했다. 행복하게 함께 살 방법을 찾고 싶은데 옆에 있게도 못한다. 저녁은 오랜만에 밖에서 먹기로 했다. 가는 길에 우체국에서 보험 서류를 보내고, 도서관에 들러 책 두 권을 반납했다. 저녁으로는 삼겹살과 항정살을 먹었다.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구워 먹었더니 맛이 아주 좋았다. 처가에도 내가 금주를 하는 이유를 전했다. 걱정을 끼쳐 드리는 것 같아 죄송했다. 어머님께는 생일 축하 용돈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공허해서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며 달렸다.
병가휴직 101일째. 오늘은 리프레시를 위해 걷기명상을 시도했다. 이름을 붙이며 걷다 보니 몸이 조금 피곤했다. 결국 주역을 배우다가 졸았다. 편안하기와 놀이하기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녹음한 것을 다시 들어봐야겠다. 저녁엔 오랜만에 친구 모임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친구들이라 어떨까 궁금했다. 여전히 변함없는 친구들이었고, 대화의 수준에서 나이가 느껴지긴 했지만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예상과 달리 다들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병가휴직 102일째. 일본 출국 전날이라 마음이 급했다. 열 시 반에 기상해 이것저것 하다가 아내의 점심 약속에 급히 준비하여 함께 나갔고, 나는 미용실로 갔다. 오랜만에 미용실에서 컷을 받았다. 실장님이 잘해주셔서 만족스러웠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높았다. 저녁에는 회사 동기가 밥을 먹자고 해서 다른 동기도 불러 셋이 모였다. 메뉴는 인도식 카레로, 처음 먹어보는 맛과 향이 나쁘지 않았다. 이후 조각 피자와 콜라를 먹으며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를 나눴다. 5년 뒤에 다시 모이자는 농담도 했다. 집에 와서 짐을 점검했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아 새벽 한 시까지 깨어 있었다.
병가휴직 103일째. 도쿄 가는 날이다. 눈을 떴더니 여섯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알람을 맞춰 놓지 않은 실수를 깨달았다. 급한 마음에 아내와 함께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비행기 티켓을 조회하다가 다음 타임으로 변경이 가능해 변경했다. 전쟁 같은 아침을 보내고 한숨을 돌렸다. 오늘 도쿄로 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비행시간이 한참 늦춰져 여유가 생겼다. 여유롭게 환전하고 마티나 라운지에서 배불리 식사를 하고 릴랙스 존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시가 다 되어 있어 스카이라운지에서 한 끼를 더 해결한 후 탑승했다. 비행기가 생각보다 편안했다. 도쿄 여행 책 두 권을 거의 다 읽을 즈음 드디어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비가 조금 내리고 있었다. 전철을 찾느라 잠시 헤맸지만 무사히 탑승했다. 큐브 호텔에 체크인했다. 깔끔한 호텔이었다. 바로 아키바로 출발해 게임 샵을 다섯 군데 들렀으나 찾는 제품이 모두 품절 상태였다. 내일은 더 멀리 나가볼 생각이다.
병가휴직을 시작한 지 100일이 넘었다. 이 기간 동안 나를 돌보는 시간은 예상보다 더 소중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면, 아내와의 식사와 대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겠지만, 쉼을 통해 그 소소한 순간들이 얼마나 따뜻한지 깨닫게 되었다.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때로는 함께 있지 못하는 순간들에 아쉬움과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내 일상의 한 부분임을,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작은 기쁨과 아픔들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고 있음을 배웠다.
출국을 준비하며 느꼈던 불안함도, 새로운 도시로 떠나며 겪었던 설렘도, 어쩌면 그동안 직장 생활에 지쳐 있던 나에게 필요한 감정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내게서는 잃어버렸던 여유와 호기심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비가 내리는 도쿄의 거리를 헤매며 찾은 작은 상점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난 익숙하지 않은 경험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 비록 길을 잃거나,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해 아쉬움이 남기도 했지만, 그 모든 과정은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통해 내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내와 함께했던 순간들, 혼자서 떠났던 여행의 여정들, 그 모든 경험이 나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쉼이 끝난 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그동안 배운 여유와 나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잊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