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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지평면에 서 있을 뿐이다, 모두가.

by Elia


사건의 지평면은 블랙홀처럼, 완전히 외부와의 정보교류가 차단된 공간이 그 외부와 만나는 면을 말한다고 한다.


사건의 지평선이 정식 이름인데, 사실상 선이 아니라 면으로 되어 있는 것이라 지평면으로 부르는 게 개념상 더 이해가 쉽다고 한다.


윤하는 연인의 관계를 사건의 지평선에 빗대어 표현했고, 필자도 엄청나게 좋아하는 노래지만,


사건의 지평면이란 개념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연인 간의 이별을 여기에 빗대는 건 차원이 다른 두 개념을 등치 시키는 것이라 뭔가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곁에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블랙홀은 죽음이다.


죽은 자와 산 자는 정보의 교류가 없다.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영을 이어나가는지 모르고, 죽은 자들도 그러하다.


영이란 개념이 끝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육체의 기능이 다하고 나면 그때부턴 블랙홀에 위치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에 반해 연인 간의 이별은, 언제든지 정보를 접할 수 있고,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으니 (비록 먼발치에서 혼자 바라보는 음침함일지라도) 죽음에 비하면 가볍기 그지없다. 하찮다고도 할 수 있다.


죽음이 블랙홀이라면 삶은 뭘까? 블랙홀, 사건의 지평선, 그리고 외부 공간이 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삶이 외부 공간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리고 질병을 발견하거나 뭔가 사고의 위험이 있을 때, 그제야 본인이 블랙홀을 마주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필자는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사건의 지평선에서 발생하고 있을 뿐이다.


인류는 단 한 번도 영원을 쟁취해 본 적 없고, 달성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00 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인생은 끝이 나게 되어있고, 아무리 의학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한들, 100 년이 200년이 될 순 있어도, 500년, 1000년으로 바뀌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 인생에선 그럴 것이다.


필자가 말하는, 우리는 사건의 지평면에 서 있을 뿐이라는 말은, 죽음은 언제나 그렇게 가깝게 있고, 죽음이 나와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그들의 삶과의 거리보다, 인간의 삶과 영원은 훨씬 먼 거리에 위치해 있다, 는 말이다.


따져보면 죽음이 인간의 친구지, 영원은 인간의 친구가 아니다. 우린 죽음과 사는 거지, 영원과 사는 게 아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슬퍼할 필요도 없다. 원래 그런 것이다. 물론 두려움과 슬픔도 원래 그런 것이니, 제로로 만들려고 할 필요도 없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된다.


사건의 지평면에선 사람들이 삶을 살지만, 어차피 우리 모두는 죽음 속에서 함께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이 오히려 건강하고 긍정적이라고 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음도 인정한다. 그런 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있다.


아무튼, 죽음이 근처에 있음을 실감한 하루이기에 또 평소의 생각을 글로 남겨보았다.


이 디지털 문서가 필자의 죽음 이후에도 잘 기록되어서 필자의 자녀가 볼 수 있게 된다면, 필자의 이러한 견해가 그녀의 슬픔을 달래줄 수 있기를 바라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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