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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May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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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요일이다. 비유 같은 게 아니고 내 이름자가 말마따나 토요일이다. 성토요일이 내 풀 네임이다. 나는 수요일에 태어났다.

“토요일이 날이 좋았어.”

토요일을 한 다발 들고 아버지가 말하셨다. 달력에서 오려낸 기다란 토요일이 아버지의 방에는 가득했다. 길일이었는지 내가 태어난 주 토요일에 소련이 해체되었다

"노병을 구출해야지."

장판을 뒤덮은 달력 더미에서 지나간 토요일을 찾으며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뉴스를 볼 줄 몰랐고 기사를 읽을 줄도 몰랐지만 글자를 외워뒀다가 제 것처럼 써먹을 줄은 알았다. ‘노병’이니 ‘계엄령’이니 하는 말들은 언젠가 텔레비전 자막이나 신문에서 본 것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 아버지는 소식에 어두웠고 컴컴한 방에는 신문지가 가득했다. 방의 네 귀퉁이 마다 3월과 6월과 9월과 12월의 신문이 쌓여 있었다(3월부터 5월까지는 동쪽, 6월부터 8월까지는 북쪽, 9월부터 11월까지는 서쪽, 12월부터 2월까지는 남쪽 모서리를 차지했다). 철지난 봄의 뉴스를 들으려면 동쪽 귀의 신문 더미를 기울이고 겨울의 뉴스를 듣고자 하면 남쪽 귀에 다가가서 냄새를 맡으면 되었다. 아버지의 방을 차지한 신문은 모두 토요일자 소식이었기 때문에, 내가 주로 읽은 것은 주말의 명화였다. 토요일자 신문을 읽고 나면 나는 만날 리 없는 일요일의 신문이 하염없이 그리워지곤 했다. 

“너, 도서관이 왜 월요일에 문 닫는지 알아?”

도서관을 기웃대는 늙은이에겐 토요일이 없다고 했다. 버리는 건 아까워하면서도 흘리기를 잘 하는 노인들이 물에 만 밥알처럼 토요일도 어딘가에다 흘렸기 때문인데, 많은 날 중에 유독 토요일을 잃어버리는 까닭은 그것이 푸르른 빛을 띠어서라고 했다. 푸릇한 토요일은 문지방, 포와 진과 나들목, 청량리와 우수리로 받은 오십 원, 귀금속 전문점과 약국 간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요일 밤부터 돌풍이 되어 날아오는 거라고, 그런 이유로 월요일에 문을 닫는 도서관이 많은 거라고 했다. 

내일은 쉽니다. 

나는 신문의 귀퉁이를 물끄러미 읽었다. 장마 전선이 북상한다는 뉴스가 실린 토요일자 신문이었다. 헤진 소매 끝으로 코끝을 훔쳤다.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찼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폐에서 비릿한 숨결을 내뱉는 계절이었다. 몇 모금 남은 해가, 재를 남기고 타들어가는 마지막 불꽃처럼 한 점 빛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고작 아홉 살이었지만 아버지가 사라질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망설임 끝에 방-아버지는 성城이라고 불렀다-의 왼편을 차지한 잡지 기둥-아버지는 남쪽 축대라고 생각했다- 끄트머리에 놓인 장화를 아버지가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주간 운세도 읽지 않고 신문을 덮으며 말했다.

내일은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밤이 되기 전에 집을 나섰다. 어딘가에 버려진 토요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 뒤, 방 안에 떼처럼 돋아난 그 많던 뉴스를 버려두고 떠났다. 집은 아버지가 자의로 버린 최초의 것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버린 다음날은 새벽부터 박무가 꼈다. 아버지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갖다버리던 ‘마마’께서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어렴풋이 보였다. 철지난 신문, 잡지, 동네 쓰레기장 에서 주워온 의자와 대야, 이불, 압도적으로 방대한 부피를 담당한 일력과 월력…등은 애초에 마마가 내다버리고픈 물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인이 떠난 방(성城)바닥에는 아버지의 마지막 족흔이 찍혀있었다. 부처님 귀 모양의 장화 밑창 자국이, 혹시나 들려올 기척에 귀를 기울였지만 가끔 집을 보수하러 나온 거미가 오지 않을 토요일을 밟으며 부스럭댈 뿐, 토요일이 돌아와도 아버지는 다시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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