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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May 10. 2021

2.

너는 왜 같은 숙제를 여러 번 하니. 물을 수도 있었지만 묻지 않았다. 공책을 번갈아 가며 여덟 칸 공책에 영어 글자를 채워 쓴 미우는 옆으로 밀어 두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손가락을 짚어가며 읽는 모양이 지도나 요람을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검지 밑에 깔린 곳이 자기가 있어야 할 좌표가 된다는 듯이 거듭 쓰다듬으며 읽어 내려가는 책의 등에는 《교실 밖 수학 여행》이라는 이름이, 책배에는 보라색 잉크를 먹여 찍은 글자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보나마나 표지 앞면에는 해밀턴 사회 복지 센터와 바코드가 찍힌 스티커가 누렇게 뜬 테이프 아래 깔려 있을 거였다. 미우가 어린이 책을 읽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미우는 독서로 식사를 대신했다. 수준 높은 책을 읽는 것은 고급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나는 미우에게 너는 왜 여러 몫의 숙제를 하는지, 어려운 책을 자꾸 읽는지 묻지 않았다. 미우도 내게 '언니는 왜 수학을 못하면서 수학을 가르쳐요' 묻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하지 않은 척 한 건데, 우리는 모두 그런 척 한 거였는데(궁금하지만 관심 없는 척 할게요). 나는 《기탄수학》을 미우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귀퉁이가 접힌 부분까지 책장을 넘겨보던 미우는 한숨을 푹 쉬고 샤프를 꺼내 딸깍딸깍 심을 뽑았다. 한참을 노크했지만 샤프심은 나오지 않았다.

“넌 아빠 없어?”

샤프심이 없냐고 물어야 했는데, 진심으로 궁금한 것을 물어 버렸다. 개가 함부로 사람을 물어 버린 것처럼, 아무렇게나 물어 놓고는 나는 지퍼를 내려 필통의 배를 갈랐다. 내게서 샤프심을 받아 든 미우가 무심히 대답했다.

“같이 안 살아요.”

“왜, 죽었어?”

“죽지는 않았을 걸요? 멀리 있어서 자주 못 온다고 했으니까.”

“지옥만큼 먼 데가 어디 있니.”

“학원요.”

노크를 이어 가자 샤프심이 삐져나왔다. 문제집 위에서 갓 삐져나온 무른 심이 우드득, 바스라지며 조금 짧아졌다.  

“학원에 가봤자 뭐하니.”

“세 자리 수의 덧셈과 뺄셈을 빨리 풀 수 있게 해 줘요.”

“야, 그런 건 교도소에 가도 가르쳐 줘.”

“전 못 배웠는데요.”

“넌 교도소에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미우는 두 자릿수와 한 자릿수의 덧셈과 뺄셈으로 빼곡히 채워진 문제집에 빠른 속도로 오답을 적어 내려갔다. 미우의 계산은 빠르고 부정확했다. 18 더하기 3은 21이라고 적는 것을 보고 나는 조금 아쉬워졌다.

“아빠는 혹시 교도소에 간 걸 까요?”

“왜, 안 됐니. 운동도 시켜주고 기술도 훈련받을 텐데. 밥도 공짜로 주잖아.”

“누가 불쌍하대요?” 

“…….”

“큰일 하려면 감방을 거쳐 가야 하는 거랬어요.”

“큰일 날 소리 하네.”

미우는 9가 들어가는 뺄셈에서 자주 머뭇거렸다.

“너무 똑똑하니까 멍청해지는 교육을 시키는 거 아닐까요.”

“맞을 지도 모르지만 아닐 지도 모르지.”

“그런 말은 저라도 해요.”

“넌 덧셈 뺄셈은 못 하잖아.”

“할 줄은 알아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는 거지.”

나는 흐흐 웃으며 미우가 읽다 내려놓은 《교실 밖 수학 여행》을 되는 대로 넘겨 가며 훑어  보았다. 나일강의 범람과 조세 제도에 대해서, 여러 다각형 모양의 농경지와 도형의 면적을 구하는 방법이 차례로 나왔다. 수능을 준비하는 내가 보기에도 수준 높은 내용이었다.

“나는 셈하기 좋아하는 집에서 태어났어. 그런데 우리 집 아빠는 곱셈을 못 했거든. 아이는 곱셈을 통해서 나오는데, 곱셈을 못하니까 답이 안 나오는 거야.”  

“커닝을 했다는 말인가요.”

“아니, 내가 문제아가 될 수밖에 없었단 얘기야.” 

‘네가 내 딸이 아니란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라.’ 마마께서는 그런 말을 하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마마가 오해라는 말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있잖아.”

우리에게는 공통적으로 없는 게 있었다.

“번듯한 아빠는 교실 밖에 없어. 그건 일종의 이데아야. 너는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밖에서도 잘하고 집에서도 잘하는 아빠가 있다면, 그건 아빠가 아니라 신의 선물이다.”

“…그건 선생님 생각이에요?”

“난 선생님 아니야. 봉사 나온 학생이지.”

“어쨌든 나이가 많잖아요.”

“넌 내가 몇 살 일 거 같니?”

“몰라요. 서른네 살?”

“야, 난 아직 대학교도 안 갔어.”

“미안. 우리 엄마가 서른넷이거든.”

“왜 갑자기 반말 하니?”

“난 서른넷 이하에게는 반말을 해.”

“반말은 해도 좋은데, 언니라고는 부르지 마.”

“누가 그렇게 불러준대. 근데 왜, 안 돼?”

왜냐하면, 나는 토요일이니까. 말했듯이 수요일에 태어난 나는 토요일이었으니까. 성 토요일이 내 본래 이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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