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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기대어 삽니다.

<아이의 말들>

by 동그래


저는 아이가 넷입니다. 아이 넷과 함께 외출할 때면 '한 집 아이들이에요?'라고 물으시며 엄지척 해주십니다. 다자녀는 국가가 키워주는 거지요? 라고 함께 물으시면 그저 웃습니다. 혜택이라곤 공영주차장(그것도 지역마다 달라서 못 받을 때도 많아요.)을 누리고 있거든요. 국가 혜택을 받으려고 아이를 넷이나 낳은 것은 아니니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웃습니다. 둘째 은유가 7살 때는 외출할 때, 특히 엘리베이터에서 우리 엄마를 '애국가'라고 부른다며 어깨를 으쓱으쓱 하곤 했어요. 애국자라는 말보다는 애국가 라는 말이 더 멋져 보였던 걸까요, 아이의 말에 몇 번이나 더 웃음을 더합니다.

아이 넷과 함께 할 때 자주 하는 두 번째 질문은 '힘들죠?'입니다. 대답은 그 때 그 때 다르지만, '대체로 행복합니다. 재밌어요!'라고 말하는 편입니다. 솔직히 남 몰래 우는 밤이 많습니다. 자녀가 많으면 걱정도 웃음도 그 만큼 많아지니 어찌 힘들지 않을까요. 날이 갈수록 막막해지고 두렵습니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도 있지만 현재 지금의 행복을 위한 의식주 해결조차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고, 형아 마음만 챙겨주는 거야.'라며 토라지는 셋째의 마음을 다독이다 보면 '내 마음은 누가 알아주냐!'며 울고 싶어집니다. 글로 다 적지 못할 어려움들이 많지만, 빵 하고 터트리며 웃는 날도 많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인 아이들과 보내는 하루는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 넘치거든요. (즐거움의 그림자는 두려움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저는 남편과 주말부부 중입니다. 그래서 주 5일 아이들과 24시간 붙어 지내고 있습니다. 막내가 아직 어린이집에 안 가서 어린이들이 늘 제 곁에 있어요. 생각만으로도 좀 힘들다 싶으시죠?

아이 낮잠 시간이 저의 유일한 자유시간입입니다. 저는 그 시간에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편입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그림책!) 팟캐스트를 듣습니다. 혼자 가만히 있는 것보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좀 힘이 납니다. 듣다보면 인생 거기서 거기구나, 모두가 삶의 무게가 있구나 싶은 생각에 위로를 받기도하고, 어떤 사람의 사연은 정말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을 살리면서 살아가기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정말 뭉클하면서 제 삶에 감사를 더 하고 의미를 더 찾게 합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뭔가 에너지가 반 정도만 충전되는 느낌이에요. 풀 에너지를 얻기엔 부족하더라고요.

그럴 때는 아이들의 어린시절 동영상을 봐요. 이게 뭐라고.. 내 시간과 에너지를 채워주더라고요. 아이가 성장하는데 있어 내가 도움이 되었구나, 내 삶이 이 작은 아이에게 의미가 있구나 하는 보람이 느껴진달까요. 나중에 성장한 우리 아이들이 '나를 키운 걸 팔할의 바람'이라 할지라도 이 아이를 키운 건 나의 시간과 나의 에너지였으니까요. (알아주라.)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밥을 줬다면(하루에 2번이라고 쳐도, 10년이면 365 * 10 * 2 = 7300 그릇), 똥을 닦아준 것도 (하루 1똥 * 365 * 4년 1460번), 읽어준 책만해도 (365*10년*1권= 3650권) 어마어마 하니깐요.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이 아이의 하루를 채웠고 인생을 구성한다는 생각을 하면 뭔가 뿌듯해집니다. 사실 이런 계산을 떠나.. 아이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참 기적같기도 하고, 내가 이 자질구레하지만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는 사실에 놀랍습니다. 10년간 무엇을 했냐 물으면 수량화된 결과를 보여주기만 해도 박수를 받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10년동안 제가 한 일의 결과는 '아이들의 밝은 웃음'이 담긴 사진 한 장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 웃음에는 제 웃음과 울음, 모든 시간과 에너지가 담겨있을 테니까요.



요즘은 제가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인지 아이가 나를 키우는 것인지 잘 분별이 안 갈 때가 많아집니다. 아마도 서로가 서로에게 물들어가고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첫 아이 키울 때만큼 외롭거나(육아독립군이여!!) 억울하거나(왜 나만 애를 키워!!) 하는 마음이 들진 않아요. 그저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고 지켜준다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내 에너지를 뺏긴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쌓아온 시간의 겹만큼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 든든한 에너지가 되고 있습니다. 서로 기대어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언론에서는 금쪽이 이야기들로, 진상 학부모 이야기들로, 서로 칼을 들고 싸우고 작은 일도 법정에서 끝장을 보자는 소식들로 가득합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우울해지고 두려워집니다. 이 아이들을 지킬 힘을 주소서, 하고 기도하지만 무기력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이들을 봅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걷어내고 아이들의 눈을 바라봅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꼬옥 포옹하며 토닥입니다. 대부분의 가정이 우리 가정과 비슷하게 하루를 버티고 때로는 즐기고 계실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고 싶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처럼 하루를 보람차게 보내고자 애쓰며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들에 귀기울이며 읽으며 '아, 그래. 살자. 오늘을 살자.'라는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낳고 육아하며 사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아이들도 자라고 나도 자랍니다. 그러면서 서로 기대어 살게 됩니다.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고, 손을 내어줍니다. 서로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위하며 삽니다.


우리 사회도 서로 기대어 살면 좋겠습니다. 작은 사람, 큰 사람, 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알아주고 채워주며 기대어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선진국이 된다는 의미가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어른들이 많아지는 거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카페에서 아이가 음료를 쏟았을 때 애 엄마는 애를 왜 이렇게 아이를 안 챙겨, 등으로 비판 하기 전에, 아이를 나무라는 말을 말하기 전에 괜찮니? 그럴 수 있지 하면서 휴지를 내밀어 닦아주는 다정한 장면을 보는 순간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좋은 사회회겠지요. 아이는 그런 수많은 넘어짐을 통해 배우고 자라는 거니까요. 사실 아이 넷이랑 다니면 사람들이 장하다 라고 말하면서도 아이가 울거나 조금 찡얼대면 엄마가 애들 막 키우나봐, 아니면 엄마가 애들 안 챙기고 뭐하냐고 힐긋 쳐다보면서 왜 아이는 많이 낳아서 저러냐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아이가 둘 일땐 잘 몰랐어요. 제가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심하면서 다녔거든요. 그런데 아이가 많아지고 제 역량을 넘어가다보니 아이들이 모든 순간 얌전하고 다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거겠지요. 그그런 순간에 아이들을 보는 시선이 다정했으면 합니다. 가장 작고 약하다고 여기는 아이에게 인격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인격이고 그 사회의 인격 수준이 아닐까 과감히 말해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랑 함께 하는 삶이 누군가의 눈총을 받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 아니면 좋겠습니다. 아이시절이 없던 사람이 없듯이, 모두가 아이였다는 걸 기억하고 아이를 존중해주길 바래봅니다.


우리 아이 넷과 함께 하는 이야기가 그런 사회의 씨앗이 되길 소망해요.

아이의 말들이 제 삶을 일으켜주었듯, 여러분에게도 그러했으면 합니다.

우리 서로 기대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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