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살, ㄴㅁㅇ
한 달 전, 나무엔님의 강연을 들었는데 꽤 인상적이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아이의 말에 남겨본다. 나무엔님이 아이였을 때 했던 말이니 아이의 말들에 남겨도 좋을 것 같다. 나무엔님이 13살 쯤 학교 등나무 아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왜 사는 걸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와서 뭐하냐고 물었다. 내가 왜 사는지 생각하고 있어, 라고 말하기는 머쓱해서 '하늘을 보고 있어.'라고 대답했는데, 그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아마도 내 삶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무엇에 빗대여 표현하거나 다른 것으로 둘러 표현해도 괜찮다는 것, 오히려 그것이 내 상황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깨달음일 것 같다. 자신의 삶을 시와 노래로 표현하는 것이 꽤 멋진 일임을 발견해서 나무엔님은 노래를 쓰고 부르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어릴 적 어떤 깨달음이 평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는 순간일 것 같다.
그 때 부르셨던 노래 중 '나무가 부르는 노래'라는 곡이 있는데, 그것도 역시 가만히 앉아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고 있던 중에 떠오른 것이라 하셨다. 가만히 있던 나무가 바람을 만나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래할 수 없었던 나무는 바람이 내게 찾아오길 기다렸고, 바람이 찾아올 때면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는 이야기를 담아 노래를 지었다는데, 그 노래를 들으며 나무와 바람의 만남을 상상해보니 참 아름다은 장면이 보였다. 바람을 만나 부르는 나무의 노래, 나는 누군가에게 바람일까? 아니면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나무일까? 나는 사람은 홀로 살 수 없고 누군가와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 생각한다. 나 혼자만 잘났다고 사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내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는 존재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나무와 바람, 바람과 나무는 얼마나 아름다운 동무일까 싶다. 나무를 연주하는 것은 바람일까, 그 나무 자신일까? 그게 누구든 나무가 불러주는 노래에 바람은 행복했고, 나무는 노래할 수 있음에 충만했을 것 같다.
은수가 나무바람 선생님(별명)에게 나무바람 그림을 그려주고 싶다더니 풀과 나무를 잔뜩 그려두었다. "바람도 그려야지?"했더니 "여기 움직이는 풀 봐. 바람과 함께 있는 거야. 바람은 안 보여. 풀이 있어야 보여."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나무엔의 노래처럼 은수도 나무와 바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만히 바라보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며 깨닫는 순간들, 그리고 그것을 글과 노래,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점점 깨닫는다. 진선미 중 나는 아름다움이 가장 맘에 드는데,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일은 가만히 하늘을 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바람을 느끼며 나무를 볼 때, 하늘 속 움직이는 구름을 볼 때, 그 안의 관계들을 엮어갈 때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 같다.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