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를 보며 살아간다. 새 이름도 아주 천천히 하나씩 알아간다. 2022년에는 박새, 딱새, 곤줄박이, 동고비, 오색딱따구리, 쇠딱따구리, 물까치 정도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제비, 참새, 비둘기, 까마귀, 까치, 직박구리가 전부였던 새 목록이 풍부해졌다. 2023에는 더 늘어나겠지.
박새는 천진하다. 날마다 오전 10시를 전후로 박새가 왔다. 두 마리가 꼭 함께 왔다. 그 모습에 엄마는 ‘부부새’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부부새는 대추나무와 감나무를 번갈아 가며 앉아서 재잘댔다. 때로는 대나무 평상까지 와서 먹이를 물어가기도 했다. 용감한 부부 새. 그 장면을 몇 번 목격한 급한덕은 평상에 옥수수며, 호박씨며 박새의 먹이가 될 만한 것은 늘어놓지 않았다.
딱새는 골똘하다. 딱새의 몸 빛깔은 겨울이면 꺼내 입는 귤(오렌지)이 그려진 스웨터의 귤색과 닮았다. 주황보다는 진하고, 다홍보다는 채도가 낮다. 새를 표현할 때면 언어의 한계를 지극히 느낀다. 뒷산의 초입에서 딱새를 보았다. 검은 얼굴과 진회색 머리털. 장대 위에 한참을 앉아 먼 곳을 응시한다. 날개에 또렷한 흰색 털은 앙증맞다. 딱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고요와 평온이 온다.
산속의 고요는 오래가지 않는다. 직박구리 녀석 때문에. 직박구리는 지랄 빽빽이다. 그게 다는 아니다. 직박구리가 날개를 접고, 유선형의 몸을 하늘 위에서 물고기처럼 통통 퉁기 듯 날 땐 귀엽다. 잘은 모르지만, 겁쟁이일 것도 같고 의리도 있을 것 같다. 먹이가 있으면, 혼자 먹기보다는 빽빽대며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어떤 위험 상황이 있으면 빽빽대며 알리는 것도 같다. 직박구리는 과일, 열매를 좋아한다. 감나무가 있는 곳이 요란한 정도로 직박구리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직박구리는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기 때의 내 울음소리를 연상케 한다. 울음이 말을 대신할 시기의 나의 별명은 빽빽이였다. 동네 시끄럽게 울어서, 동네에서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한다.
딱따구리는 열중한다. 소나무에 붙어서 나무를 쪼아 먹이를 구하느라, 나 따위는 안중에 없다. 아주 열정적으로 나무를 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이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일하고, 먹는. 스스로 생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무해한 방식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딱따구리는 주로 소리에 집중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전에 뒷산 오를 때는 그렇게 다녀도 딱따구리 한 번을 못 봤는데 이제는 소나무 수피 조각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역으로 딱따구리를 찾기도 한다.
새를 좋아하지 않았다. 새부리에 쪼이는 상상이 바로바로 되었고, 비둘기는 심지어 공포의 대상. 아침잠을 깨우는 방해꾼이었다. 물까치 소리는 정말 지긋지긋해했다. 어느 날부터 죽은 새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인도에 죽어 있는 새를 화단으로 옮기는데 무게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놀라웠고 울컥했다. 새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가볍다면 날개가 없어도 날 수 있겠다. 날고 싶다기보다 날 수 있다는 마음이 더 중요했다.
새로운 생명체를 마음에 들이니, 안 쓰던 동사와 형용사가 따라온다. 삶의 변화의 지점에는 사람이 있고, 책이 있고, 생명체가 있다. 다른 생명체에 관한 첫 번째 관심은 문어였다. 문어의 매력에 빠져 타코미라는 필명을 만들기도 했다. 사이 몽고메리의 ‘문어의 영혼’을 읽고 난 후, 나의 내면에는 이전에 없던 흥미로운 공간이 생겼다. 숨통이 트였다. 그 공간 덕분에 인간사의 사사로운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경직되어 있을 때는 미끄덩하고 흐물흐물한 문어를 그린다. 살기 위해서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변신술을 부리는 문어에 매료되었다. 사람에게 치이고 지쳤을 때, 다른 생명이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나의 시선은 갇혀 있다가 열리는, 어깨는 위축되다가 펼쳐지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들에게서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이끼와 함께’를 읽었다. 이끼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 적응하며 환경에 따라 생존법을 달리 하며 생을 꾸려나갔다. 고착되지 않았다. 탁월했다. 심신이 나약해지면, 이끼를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러려면 그동안 회피해 왔던 나를 제대로 직시하는 게 필요하다. 혼자의 힘으로 역부족이라는 걸 안다.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알아가는 게 힘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으로 뭉뚱그려 있던, 타인도 다르게 인식되었다. 개별인. 독립적인. 각자의 생존법을 가진,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들. 종의 구별 없이 생명체로 부르고 싶다.
그들이 왜 나와 만나졌는지. 또는 만날 수 없는지. 어떤 접점에 대해 곰곰이 들어가 보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은 나를 살게 한다. 나라는 개체의 생존법. 생명이 다른 생명을 만드는 것과 같다. 책은 사물이지만, 생명이기도 하다. 이즈음 생명체의 범위는 살아있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고 확장된다. 쓰면 쓸수록 거창해지는 원치 않는 느낌의 글이다. 결국,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내가 살기 위해서.
내년에도 새를 보며 살고 싶다.